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발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김씨는 병세가 악화되던 4월 서둘러 원고뭉치를 출판사에 넘겼지만 책으로 받아보지는 못했다. 1978년 등단해 스무해를 넘긴 시작(詩作) 인생이 채 70편이 못 되는 유고시로 남은 셈이다.
여러 시편들이 '유고 코드'로 읽혀진다. 투병의 흔적, 죽음을 눈앞에 둔 심경, 절망 가운데서도 꿋꿋함을 잃지 않았던 모습 등이 짐작된다. 노골적인 '귀지를 흘리며-병상일지'에서는 병원 침상에 눕는 순간 자신의 귀에서 떨어지는 허연 귀지를 목격하고는 "그동안 정체된 것들의/여린 호흡/귀지란/내 몸의 새살이다"라고 노래한다. 이어 시인은 "엄청난 밀어내기로/윤기 나는 귀지"를 귀 밖으로 내보낸 싱그러운 생명의 힘에 주목한다. '코피란 무엇인가'에서는 "코피란 몸이 애써 짜낸 진액이다/누런 색깔이 몹시 하얘질 때까지/심혈을 다해 끝까지 짜낼 일이다"라며 코피를 통해 몸의 고해성사를 알아들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냄새를 닦을까'는 불길하다. 후각이 예민해진 탓일까. 볼일 보러 화장실에 간 시인은 화장실에 놓인 컵 언저리에 살짝 진쿠렁 내음이 묻을까봐 신경 쓰인다.
'불안'에서는 "불안쑤시개로 콕콕,/불안찌꺼기를 쪼아내어도" 부메랑의 예리한 날 끝처럼 여전히 파고든다고 털어놓았다.
유고를 정리한 동국대 장영우 교수는 "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대체의학에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 때문인지 많은 시편들이 어둡지 않다. '은방울나무'에서는 "맑은 겨울비 가늘게 그친 아침" 신(神)이 밤사이 다녀간 듯 순은(純銀)같은 물방울을 가지에 인 은방울나무를 아름답게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