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들기] 55. 지명에 남은 일제 잔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나는 1983년 8월 20일 신설된 서울시 가로명위원회의 위원이 됐다. 이 위원회의 이름이 85년 11월 지명위원회로 바뀌면서 지명위원이 돼 지난 6월 말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약 1천개의 길.땅 이름과 지하철 3~9호선 역명을 지었다. 이 과정에서 숱한 편견과 싸우며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칠패길.새문안길.사가정길과 학여울(3호선), 애오개.굽은다리(5호선), 새절(6호선) 등의 역명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명위원회의 성격이 자문위원회이기 때문에 결코 넘을 수 없는 제약이 있었다. 자문해 오지 않으면 작명도 개명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는 우리나라 곳곳의 거리 이름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꿨다. 혼마치(本町).모도마치(元町).메이지마치(明治町) 등의 이름을 들여왔다. 후루이치(古市).다케조에(竹添) 등 자기들이 기념하고 싶은 이름도 길이나 마을에 붙였다.

서울 시내 일본식 지명은 46년 10월 2일 모두 바뀌었다. 이때 45개동 이름도 개정됐다. 가장 큰 특징은 위인의 이름이나 호를 붙인 것이다. 퇴계로.충무로.을지로.세종로.원효로.충정로 등 6곳이다. 원효로는 일제 때 모도마치(元町)였다. '元町'이 원효로(元曉路)가 됨으로써 '元'자를 살린 결과가 됐다.

최초의 일본공사관은 1880년 서대문 밖 청수관에 설치됐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2년간 이곳에 자리했다. 일제 때 이 일대의 지명이었던 다케조에치(竹添町)은 일본공사로 있다가 갑신정변으로 쫓겨간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46년 지명 개정 때 대나무와 관계 깊은 선열인 민충정공을 기리기 위해 '竹添町'을 충정로로 했다. '元町'의 '元'자를 살리기 위해 원효대사를 빌렸고, '竹添町'의 '竹'자를 살리기 위해 충정로라고 이름 지었으니 당시 지명위원들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종이 걸려 있기 때문에 종로라고 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鐘路'라고 해야지 결코 '鍾路'일 수는 없다. '鍾'은 술잔 또는 종발이란 뜻으로 쇠북 종(鐘)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鍾'이 '鐘'의 약자처럼 쓰였다. 획수 때문이다. 20획의 '鐘'보다 17획의 '鍾'을 쓰기가 쉽다는 이유로 '鐘' 대신 '鍾'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조선총독부가 바로 이런 점을 이용했다. 14년 4월 1일 '경성부 町洞의 명칭.구역'을 정하면서 종로 1~6정목의 공식 명칭을 '鍾路'로 통일하고, 43년 6월 9일자로 경성부 내 구제(區制)를 실시할 때 '鐘路區'로 해야 할 것을 '鍾路區'로 해버렸다.

광복 후 '鐘路區'로 되찾을 기회가 많았는데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길.땅이름에도 넋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종로에 걸려 있는 종과 길.땅이름에 넋이 있다면 1백년 가까이 전혀 다른 뜻을 가진 남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종로와 종로구는 그들의 원래 이름을 되찾는 데 무관심한 많은 관계자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 까.

누군가 한글 시대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다. 아무리 한글을 쓴다고 해서 '申.辛.愼'이라든가 '柳.兪.庾' 등의 성씨를 혼용해서 쓸 수 없듯 '鐘'과 '鍾'도 결코 같은 뜻으로 쓰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종로구처럼 일제 잔재가 남아있는 지명은 전국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앞으로 시간을 들여서라도 차근차근 바로잡아야 한다.

오랫동안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끝>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