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뚜라씨는 고향에 갔을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미얀마 출신의 노동자 뚜라씨가 최근 한 신문에 투고한 글엔 그가 이방인으로 8년을 보낸 한국에 대한 미운 정 고운 정이 그대로 녹아 있다. "부천은 저의 고향입니다. 저에게 안정과 따뜻함을 주는 곳, 제가 좋아하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어느새 부천은 제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저임금과 차별을 겪기도 했지만 외환위기 때는 동고동락하며 어려움을 헤쳐 왔다고 자부한다.

뚜라씨는 불법 체류자다. 4년 이상 체류했으므로 출국 대상자다. 그러나 그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삶을 갑작스럽게 접고 떠나갈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느날 갑자가 태풍이 불어와 나무 위 새 둥지를 날려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더 머물며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년 8월부터 시행되는 고용허가제에 앞서 지난달 말까지 불법 체류자 확인 등록이 끝나고 4년 이상 체류자의 자진 출국 시한도 지난 15일로 끝났다. 어제부터 시작된 정부의 집중단속에 걸리면 강제 추방이다. 뚜라씨가 미얀마의 고향을 찾아갔는지, 아니면 불법 체류자로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뚜라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3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불법 체류의 길을 택한 사람이 10만명이 넘는다. 이제 이들은 정부 단속반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

불법 체류자 단속을 앞두고 예상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벼랑 끝에서 등 떼밀린 사람들이다. 빚을 갚지 못해 고민하던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는 목을 매 자살했고, 고향 가족들에게 더 이상 돈을 못 보내게 된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는 지하철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회와 성당 등에서 농성에 들어간 사람도 적지 않다. 많은 불법 체류자는 비상식량을 챙겨 지방의 피난처나 도심 다락방으로 '잠수'했다. 몇달 만 숨어 버티면 단속이 완화되지 않겠느냐는 속셈이다. 1992년 이후 불법 체류자에 대한 범칙금 유예조치가 16차례나 되풀이되는 등 정부 정책이 오락가락했으니 이번에도 '선처'를 기대할 만도 하다.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앞두고 30만명의 불법 체류자 가운데 3분의1을 내보낼 셈이었지만 이 계획이 처음부터 빗나갔다. 그 결과 불법 체류를 택한 10만명을 한꺼번에 단속 대상으로 삼는 부담을 안게 됐다. 단속 과정에서 인권 침해나 불상사가 생길 수 있고 수용시설도 형편없이 부족하다. 경찰서 유치장에 수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가 퇴짜를 맞았을 정도니 딱하다.

석달치 임금을 받지 못한 항의 표시로 공사장에 불을 지른 중국 동포의 사례에서 보듯 불법 체류자들이 임금 체불로 겪는 고통은 당국이 나서서 적극 해결해 줘야 한다. 강제 출국을 앞둔 불법 체류자의 약점을 이용해 임금 지급을 미루는 악덕 기업주가 있다면 나라 망신이다.

궂은 일, 험한 일을 도맡으며 우리 산업 현장을 지킨 많은 제2, 제3의 뚜라씨를 내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내국인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운 판에 우리 말이 통하는 외국인 숙련공까지 빠져나가 영세업체들이 겪는 어려움도 크다. 이를 감안해 당국은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는 기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이들의 취업을 봉쇄한다는 당초 방침을 바꿔 중소 제조업체 근무자는 한시적으로 단속 대상에서 제외키로 했다.

불법 체류자를 정리하는 일은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 진통이다. 비정상적 외국인 인력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부의 일관된 정책 의지가 중요하다. 엉성한 준비, 흔들리는 단속 기준이 정책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한천수 사회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