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일본 왕세자의 '파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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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본에서 '왕실'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래서인지 왕족들은 격식이나 행동에 제약이 많다.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얼굴 표정까지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외교관 출신으로 왕세자빈이 된 마사코(雅子)가 왕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까. 이러한 상식에 비춰볼 때 좀처럼 보기 힘든, 아니 '있을 수 없는' 광경이 22일 벌어졌다. 장소는 도쿄의 젠닛쿠(全日空) 호텔 지하 1층. 바로 옆 산토리 홀에서 열린 '한.중.일 우호 특별기념 우정의 가교 콘서트 2007'의 리셉션 자리에서였다.

행사에는 콘서트 실행위원회 회장인 도요타 쇼이치로(豊田章一郞) 도요타자동차 명예회장, 라종일 주일 한국대사, 왕이(王毅) 주일 중국대사, 그리고 음악가를 대표해 정명훈씨의 인사말만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이날 콘서트에서 비올라 협연에 참가했던 일본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무대에 올라 예정에 없던 '즉석 연설'을 했다.

"대단히 귀중한 경험을 얻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일.한.중의 우호에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면 다행이다"라는 원론적인 내용이긴 했다. 그러나 "일반 행사에선 연설하지 않는다"는 왕실 불문율을 깬 파격에 300여 명의 참석자는 깜짝 놀랐다. 왕세자를 담당하는 궁내(宮內)청 관계자들이 식은땀을 흘린 건 물론이다.

파격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리셉션이 무르익어갈 무렵 왕세자는 갑자기 비올라를 들고 무대에 올라 한국.중국의 연주자 세 명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이날 생일을 맞은 정명훈씨를 위한 축하 '깜짝 이벤트'였다. 일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가 일반인 앞에서 '일개 개인'인 한국인 지휘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주를 하고, 서로 포옹하는 모습은 이날 행사장에 있던 일부 보수적인 일본인의 눈에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왕세자는 그런 반응이 있을 것이란 것을 각오하면서도 이 같은 파격을 보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에 담긴 메시지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음악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는 정명훈씨의 말처럼 음악을 매개로 한 이날 자리에는 왕세자와 보통 음악가, 그리고 한국.중국.일본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내셔널리즘과 고정관념을 내던지면 '가까운 이웃' 세 나라가 보다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란 느낌과 자신감을 갖게 한 행사였다. 그런 점에서 내년에는 한국이 일본 왕세자를 한국에 초청해 '한.중.일 우정의 가교 콘서트'를 여는 건 어떨까.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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