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7)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193사단 송별회|이용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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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나는 곧 상해로 가 귀국선을 알선해주는 교민 사무실을 찾았다. 선편을 알아보니 3월 하순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꼭 보름 후였다.
그렇게 말해준 중년신사는 이철 선생으로 그는 구한말 대한제국 장교였던 부친 이인팔옹을 따라 상해에 망명해 온 분이었다. 그는 상해에서 활약했던 독립지사는 물론 민족반역자, 암흑가에서 활개치던 교민들의 행적을 훤히 알고 있었다.
지면관계로 그분에게 들은 33인중의 한사람인 이갑성이 상해에서 저지른 민족반역실천실화,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횡령하고도 해방 후 귀국하여 명사임을 자처한 사람의 실태, 윤봉길 의사에 얽힌 비화 등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리라고 본다.
○월○일.
내일은 내가 2년간 몸담아 일해 왔던 193사단을 떠나는 날이다.
소중광 사단장은 우리에게 작별인사는 그만두고 대신 같이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그날밤 회식은 사단장과 왕참모장, 그리고 김영주 등 우리 동포 네 사람들만의 오붓한 자리였다. 그 바쁜 사단장이 우리들을 위해 송별회를 베푼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단장은 그간의 우리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앞으로 대륙에 전운이 가시면 다시 찾아달라는 따뜻한 말을 했다. 술이 몇 잔 돌아가는 동안 우리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무렵까지도 중국에서는 8·15승리 때 장개석 총통이 국민에게 「보원이덕」(덕으로 원수를 갚자)하자는 요망에 대해 아직도 말이 많았다. 대국다운 자비라고 찬양하는 측도 있었지만 전쟁 중에 일본이 했던 비인간적인 처사와 모독은 그냥 용서할 수 없다는 비판도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배상금을 한푼도 청구하지 않고 「덕」으로 용서하라는 장개석에 대해 젊은 장병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 것은 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을 지휘관들이 크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일본에 전쟁배상금 5백억 달러를 요구함은 물론 일본 본토에 있는 광공업시설을 전부 중국으로 옮겨오고 지금 중국에 있는 일본군과 거류민 약2백만 명을 그대로 억류시켜 전쟁으로 파괴된 모든 것이 전쟁이전의 상태로 복구될 때까지 강제 노동시켜야 한다」고 장개석에게 대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한 사단장은 『자, 조선 동지들! 당신들 같으면 장개석 총통을 따르겠소, 아니면 중공의 주장을 따르겠소. 한마디로 어느 목인지 말해 보시오』하고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차마 중공 편이라고 말하기 거북했다. 망설이는 것을 보고 사단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장개석 총통이 아니라 가령 조선의 대통령이 강력하게 일본을 용서하자고 한다면 당신들은 대통령 뜻에 따르겠소, 반대하겠소. 조선 동지들, 어서 말해 보시오.』
『사단장 각하, 나는 대통령 명령에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과 대결하겠습니다』고 김영주가 단호히 말했다.
『대결한다고.』
『그렇습니다. 국민감정과 이반된 대통령이라면 그런 대통령을 모시느니 차라리 없애 버리겠습니다.』
김영주는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그는 열이 오르면 거품을 내뿜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얼른 김영주의 소매를 잡아끌며
『그만 합시다. 장개석을 없애버리자는 뜻으로 오해하겠어요』하며 조선말로 만류했다.
소사단장은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러한 김영주의 말에 오해는커녕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선동지들 역시 그런 생각이구만…』하며 크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 소사단장은 당시 걱정거리였던 젊은 부하들의 의식구조를 조선청년의 그것과 비교해본 것으로 생각된다.
사단장은 자리를 뜰 때 어려운 일이 있거든 찾아가라면서 편지 한 통을 주었다. 그 편지는 상해지구 위수사령관 탕은백 장군에게 가는 것이었다.
탕 장군은 먼저 필자가 소개했던 상해인성 축하행진 때 일본군을 참가시켜 말썽을 빚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탕 장군과 소사단장은 동서간이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 지금 필자가 관계하고 있는 독립유공자협회 최기복 이사의 며느리가 바로 탕은백 장군의 딸 탕국방일 줄이야.
사단장은 나에게 편지를 건네주고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엉금엉금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꼭 두꺼비 같았다. 「복두꺼비」라는 사단장 별명은 내가 지은 것인데 사단에서는 잘 지었다고 대유행이었다. 사단장도 자기 별명이 이 「복두꺼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작명자가 나였기 때문에 야단을 치지는 못했다.
그 후 193사단은 중공군과의 대결로 대륙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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