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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한민족 피 속엔 노래와 춤의 DNA가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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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만난 사람=이장직 음악전문기자

종묘제례악에 이어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지 2년이 지났다. 사물놀이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적 상징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우리 전통음악은 세계인들에게서 예술적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과연 제대로 즐기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국악'이라고 이름 붙인 음악을 외국인들도 듣고 과연 한국 음악이라고 생각할까. 국악 관현악단이 베토벤을 연주하고 가야금 앙상블이 록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이색적인 '실험'이 아니라 국악계의 주류로 자리 잡은 게 엄연한 현실이다. 평생 '국악 운동가'로 음악 현장에서 호흡해 온 최종민(65) 동국대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 '코드 인사'가 빚은 잡음에 환멸을 느껴 중도에 포기하긴 했지만 2003년에는 국립국악원 원장에 도전했던 그다. 서울 장충동 남산 자락에 있는 국립극장 예술진흥회 회장실에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인들은 음악에 소질이 많은 것 같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한국인은 정말 음악을 잘한다. 온 국민이 가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소프라노 홍혜경, 테너 김우경 등 한국인 성악가 2명이 동시에 주역으로 출연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민족의 피에는 노래와 춤의 DNA가 흐르는 것 같다. 동맹.영고.무천 같은 고대의 제천 의식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제사이고 축제였다. 고려 시대의 팔관회나 연등회도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중요한 뒤풀이 내용이었다. 마을의 당제나 별신굿.대동굿 같은 행사에도 노래와 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될 정도다. 모심을 때나 김맬 때도 노래를 한다. 한국인에게 음악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왕실에서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전문 악사를 뒀고 지방 관아에도 악제가 있었다. 문화유산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엄청난 것을 상속받은 부자라 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국악이 점점 가벼워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요즘 국악 애호가들은 주로 산조나 시나위, 판소리 등 민속악을 좋아한다. 반면에 정악(正樂)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조상들은 영산회상이나 가곡 같은 정악으로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해 왔다. 사리사욕을 없애고 정대한 자기 본성의 선한 마음을 도야하기 위해 하는 음악이다. 음악을 가꿔 나가는 마음이 곧 도(道)요 풍류였다. 음악이 곧 수양의 도구였다. 정악은 오랜 세월에 걸쳐 '더 바른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면서 발전시켜 온 음악이므로 듣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정악에 우리 음악의 진짜 아름다움이 있는데 제대로 만나지 못해 못 느낄 뿐이다."

-민속악도 원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판소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듣는 사람에게 최고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는 천일합일(天人合一)의 세계다. 자연의 온갖 소리가 곧 '하늘'이다. 하지만 판소리를 제외하면 민속악 분야에서도 어정쩡한 퓨전 국악이 판을 치고 있다."

-'국악의 대중화'하면 곧 '퓨전 국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상업성을 추구하다 못해 국악기에 서양악기를 섞어 쓰는 것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랏돈을 쓰는 국립국악원이나 공공 단체에서까지 앞장서서 퓨전에 열을 올리는 것은 문제다. 멀쩡한 우리 음악을 서양식으로 바꿔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만든다. 문화예술위원회나 서울문화재단에서도 전통음악 연주와 보급엔 별 관심이 없다. 창작 진흥이라고 해서 퓨전 국악에만 돈을 쏟아 붓는다."

-퓨전 국악은 음반도 잘 팔리고 방송에서도 인기다.

"일반 대중이 퓨전 국악을 듣고 좋아하는 것은 국악 아닌 부분이지 국악 자체는 아니다. 우리 음악은 몇 가지 유형으로 요약되는 서양음악과는 다르다. 지방에 따라 장르에 따라 각기 다른 토리('실뭉치'라는 뜻. 선율이 움직이는 독특한 진행 방향)로 돼 있어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만큼 음악적 자원이 풍부하다는 얘기도 된다. 당장 어렵다고 흥미 위주로 흘러서는 안 된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만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신나는 음악은 그냥 그때뿐이다. 정악의 감동은 오래 간다. 퓨전에 대해 비판하면 '구식'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다. 언론에서도 퓨전 국악만 부각시킨다. 국악의 대중화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제대로 된 국악을 들려주는 것이지 대중에 영합해 국악의 본질을 훼손하는 게 아니다."

-가야금 합주로 비발디의 '사계'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연주하는 게 유행이다.

"국악인들마저 서양음악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 있다. 음악을 직업으로 한다는 사람들이 음악이 되고 안 되고를 모르니 안타깝다. 국악기로 재즈나 서양음악을 편곡해 연주하는 것은 음악적으로 성공하기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진짜 전통음악은 오간 데 없고 서양식 퓨전 국악만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전통이란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인가.

"일본에서는 스승의 음악을 음정.박자가 한 치도 틀리지 않게 재현하는 것을 전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계속 바꿔 나가는 게 우리식 전통이다. 인간문화재라는 칭호도 누구누구의 제자라는 것 따지지 말고 그 시대 최고의 명인 명창에게 줘야 한다."

-초.중.고교 음악교과서에 국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학교에서 국악을 많이 가르치는데도 국악을 제대로 즐기는 인구는 크게 늘지 않은 것 같다.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드물다. 악보로 나와 있는 내용만 서양음악식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많다. 교과서에 실린 국악곡의 대부분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다. 하지만 서양식 악보대로 음정.박자 맞춰 부르는 것으로는 국악의 감수성을 키울 수 없다. 민요를 가르치는 것은 그 노래 속에 녹아 있는 우리의 '음악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다. 시김새(한 음에서 다음 음으로 연결할 때 떨어주거나, 흘려 내리거나, 꺾어 내리거나, 밀어 올리는 등 가락에 멋을 더해주는 표현) 없이 뻣뻣한 민요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 민요를 서양식으로 편곡해 가르치는 것과 같다. 현지 주민들이 하듯 '진도 아리랑'의 다양한 곡조를 가르쳐 각자 선택하여 부르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더 멋진 가락으로 노래하도록 하는 게 제대로 된 민요 교육이다."

-언제부터인가 판소리나 가야금 연주에 마이크를 사용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선비의 사랑방에서 연주하던 음악을 서양식 대형 무대에 올리다 보니 악기편성도 확성장치까지 사용하게 됐다. 국립국악원 예악당이나 경기도국악당도 모두 서양식 다목적홀이다. 대청 마루나 마당을 무대 삼았던 판소리는 옛날에는 멀리까지 들리도록 발성법이 발달했는데 요즘엔 마이크를 쓰다보니 판소리다운 맛이 없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일절 쓰지 않는 200~300석 규모의 판소리 전용극장이 필요하다. 나무로만 내부 마감을 해 공명이 잘 되면 좋겠다. 한적한 교외라면 사방이 탁 트인 무대를 만들어도 된다. 가령 남한산성에다 판소리 전용무대를 만들어 관광자원화할 수도 있다."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 올해 10월 완공을 목표로 300석짜리 국악 전용극장을 짓고 있다.

"한옥마을에서 몇 차례 국악공연을 해보니 반응이 좋았다. 서울시에서 국악계의 숙원사업을 맨 먼저 실천에 옮겨줘서 고맙다. 서울.남원.진도에 이어 부산에 국립국악원을 짓고 있지만 판소리 전용홀을 갖춘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대도시마다 스피커 없이도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판소리 전용극장 하나쯤 있어야 한다."

-판소리보다 창극이 더 재미있다는 사람이 많다.

"창극도 너무 대형화하다 보니 예산도 많이 들고 주인공 몇 사람 위주로 작품이 흘러간다. 판소리 눈대목(하이라이트)을 한 시간 내외로 엮어 소극장용 창극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출연진도 대여섯 명이면 충분하다. 적은 예산으로 많은 무대를 만들 수 있다. 국립창극단장으로 있을 때 어린이 창극단을 만들어 소극장에서 공연한 것도 이 때문이다. 판소리 자체가 대중성이 있기 때문에 잘만 만들면 흥행에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서양에서도 큰 무대보다는 작은 무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우스 콘서트나 살롱 음악회가 알게 모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국악의 문제점은 무대가 너무 커지면서 발생했다. 큰 무대에서 남창 가곡을 부르면 무슨 감동을 받을 수 있겠나. 3년 전 한옥 마을에 있는 박영효 고택(古宅)에서 '느리고 아름다운 서울 풍류'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무척 반응이 좋았다. 안동 임하댐 수몰 지구의 한옥을 복원한 지혜예술촌에서도 20~30명이 모여 고택 음악회를 했다. 옛 한옥을 문화공간으로 되살리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였으면 좋겠다."

-국립국악원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나.

"그동안 국립국악원은 몸집만 키웠지 내용 면에서 퇴보한 부분도 많다. 지방에 새로 생긴 국악원도 그 지방의 국악 수요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의 설립 목적을 다시 되새겨보라고 말하고 싶다. 옛날에는 매주 한 차례씩 전통음악을 하루 종일 외워 연주했다. 요즘엔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려면 몇 달 전부터 악보 보면서 연습해야 한다. 겉으로 매끈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감동을 주지 못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중요하다. 악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대가 바뀌면서 국립국악원의 역할도 점점 커져야 하겠지만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최종민 교수는 …

'국악 전도사'로 방송과 무대.강단을 오가며 활동해 온 최종민(65) 교수의 국악 해설은 구수한 입담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음악의 핵심을 짧은 몇 마디로 짚어 주는 해설을 듣고 나면 처음 듣는 국악 가락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국악 해설 분야에도 명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다면 '인간문화재'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의 몫이다. 1975년 KBS 라디오 프로그램 '민요 백일장'을 시작으로 30년 넘게 '국악의 향기' '흥겨운 한마당' '우리가락 노랫가락' '전통의 향기' '최종민의 국악세상' 등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다. 강릉에서 태어나 경북 영풍에서 자랐다. 안동사범학교와 서울대 국악과를 거쳐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남원정보국악고 교장, 국립창극단장을 지냈다.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국립극장 예술진흥회 회장,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판소리진흥회 회장, 충무아트홀 이사로 있다. 2006년 기독교문화대상 국악 부문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