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강제 이주 첫해는 땅굴 생활|우즈베크 황무지 개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우즈베크스탄으로 옮겨오게 된 것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서였다. 스탈린이 극동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게된 몇 가지 원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인에게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한 쓰라린 기억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1931년 소위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만주)을 강점하게 되자 중국과 국경을 접한 소련으로서는 일본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소련지역에 거주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거나 반대로 일본을 위해 간첩활동을 하는 친일한인들을 똑같이 두려워했다. 더욱이 당시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침략전쟁 정책에 따라 중일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주 극비리 추진>
둘째, 소련은 한국인들의 기술을 이용해 식량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한국인들은 벼농사를 짓는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 벼농사·목화재배 등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는 광활한 중앙아시아를 개척하려는 의도도 개재돼 있었던 것 같다.
셋째, 당시 소련은 민족문제가 매우 복잡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을 중앙아시아에 거주시킴으로써 각 민족의 분산정책에도 부합시키려 했다고 보여진다.
한국인을 강제 이주시키는 문제는 소련 당국에 의해 극비리에 추진됐다. 대개 한국인들에게는 하루전 또는 몇시간 전에야 그 사실이 통지됐다. 평소 소련 관리와 친했던 한국인들 가운데는 조금 먼저안 사람도 있었겠지만 비밀을 유지해야 하고 더욱이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었으므로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한국인의 강제이주는 중일전쟁이 개시된 바로 다음달인 1937년 8월부터 10월까지 강행됐다. 농산물을 추수할 시간도 없었다. 애써 가꾼 곡식들을 들에 버려둔 채 단지 그릇 몇 개만을 가지고 나왔을 뿐이었다. 가축·농기구·가재도구 등은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소련 당국에서는 그것들에 대한 보관증을 써주었지만 격분한 한국인들이 그것을 받을리 없었다.

<노인 등 수천명 숨져>
박 드미트리 니콜라예비치 교수는 그 당시 11살이었는데 부모님이 내팽개쳐 버린 보관증을 몰래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후 그것을 소련 당국에 제출, 모든 재산을 보상받았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또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 집행시 관리들이 난폭하게 몰아세우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회유책도 병행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까지 소련 당국의 회유책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는데 실제로 체험한 당사자를 통하지 않은 채 개연성만으로 역사가 얽혀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박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실려가는 도중에 겪었던 이야기들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화물차에 실렸고 약1개월에서 2개월이 걸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위생 조건이 열악했을 뿐만 아니라 식료품도 부족해 가는 동안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수천명씩 죽어갔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후에도 한국인들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기후와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집단마다 이주 지역이 달라 이산의 뼈저린 설움을 겪지 않은 가족이 없었다. 당국의 소수 민족 차별이 안겨주는 심리적 압박감에 더해 강제 이주지에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우즈베크스탄은 전소연방공화국 중에서도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나라였던 만큼 이주민을 수용할만한 주택이 마련 돼 있지 않아 한인들은 도착후 1년여동안이나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됐다.
극동에서는 사범학교니, 기술학교니 해서 그나마 한인들을 위한 각종 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수 있었으나 이곳에는 교육 시설이 전무했다.
이주 한인들에게는 국경 근처를 제외한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두 지방만으로 거주가 제한 돼 있었다. 우즈베크스탄에 온 이주민의 총수가 1만6천5백여명이나 되는데 1937년에서 38년에 걸쳐 이들에게 48개의 협동조합만을 조직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2백여개의 소규모 기존 조합에 임의 배치한 것도 견디기 힘든 난관의 하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즈베크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돼 온 한인들을 매우 인도적으로 대해주었다는 것이다.
소련 당국도 이들 한국인들을 개간에 이용하기 위해 트랙터 60대와 약간의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그 결과 황무지나 다름없던 그 당에서도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 한국인의 벼농사 기술은 어느 민족에 비해 탁월한 바가 있어 많은 수확량을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뼈뿐만 아니라 참외·목화 등의 작물도 재배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들은 토착민과의 협력을 비교적 빨리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18만3천명 거주>
그러나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1년 제2차세계대전(소련에서는 조국 전쟁이라고 부름)이 발발했다. 한국인들은『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군대에는 동원되지 않았지만 노무자로 강제 징집 당해야 했다. 즉 생산대로서 스베트로프스크·우후투·우푸·툴라 등과 같은 다른 공화국 도시의 일터에 강제로 배치됐던 것이다.
또한 한국인 조합에서는 전쟁을 뒷받침할 물품을 생산하는 데 주력하게 됐다. 렌닌·스베르들로브·프라브드·몰랴드나야·즈베르다·세베르느 등과 같은 협동조합에서는 1943년 전선으로 60만루블을 송금, 소련군을 지원했다.
아울러 최 세르게이라는 사람은 비행 연대의 건설을 위해 혼자 힘으로 10만루블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한국인들에 대한 소련 당국의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쌀·목화·채소·과일·식육 등을 전선에 보낼 수 있었던 데는 한국인 조합의 역할과 노력이 컸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국인에 대한 정치·사회적인 억압이 어느 정도 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주의 자유는 여전히 제한된 상태였고 민족적인 차별 문제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89년에 시행된 전 소련 인구 조사에 의하면 우즈베크스탄에는 약18만3천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그중 타슈켄트에만 4만5천명, 타슈켄트주에도 5만5천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살고있는데, 이들 우즈베크스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집단 농장인 콜호즈와 국영농장인 소프호즈에 속해 있다고 한다. 콜호즈는 집단 농장이면서 자체에 시 회장을 선출할 수도 있고 소득을 분배할 수도 있지만 소프호즈는 국영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회장을 파견하고 월급도 준다고 했다.
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회장과 김 표트르 게르노비치 교수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곧 김병화 농장으로 향했다.

<목화 더미들 즐비>
산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원을 가로질러 자동차로 한 시간쯤 갔을 때 레닌의 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받았다는 저 유명한 김병화의 이름을 딴 김병화 콜호즈가 나타났다. 농장 사무실과는 사전에 연락이 있었던 관계로 박 부위원장과 직원 일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박 부위원장의 안내를 받아 먼저 사무실 앞뜰에 근엄하게 서 있는 김병화의 동상에 참배하고 나서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목화 더미를 둘러보았다.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많은 목화를 생산해낼 수 있다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김병화 콜호즈는 목화뿐 아니라 벼 생산에 있어서도 소련 내에서 유명하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박 부위원장은 어느 한국인이 김병화 콜호즈에 와 방직공장을 세우려 한적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필자는 그 더미에서 목화를 한 움큼 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곳까지 강제 이주돼 온 우리 동포가 피땀 흘려 생산한 것을 한국에 가지고 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박 부위원장은 우즈베크스탄에 거주하는 약1백명의 한민족 대표들이 소련 정부의 레닌 훈장과「금별」메달, 그리고 사회주의 노력 영웅의 칭호를 받았다고 자랑했다. 그 중 김병화는 유일하게 두차례나 사회주의 노력 영웅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박 부위원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1937년 이후 재소 한인들의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