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사회의 타락한 언어 세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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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시인 오규원씨(50)가 여섯 번째 시집『사랑의 감옥』을 펴냈다(문학과지성사 간). 68년『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오씨는『분명한 사건』『순례』『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가끔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등의 시집을 잇따라 발표하며 산업사회의 불신화되고 제도화된 대상과 관념의 틀을 부수고 자유로운 정신의 장을 열고 있다.
『우리는 지금 꽃이나 시내나 초가집과 함께 살기보다 아파트·버스정류장·분식집·광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산업화된 도시의 삶을 지탱하는 도구화된 언어, 수단화된 언어들 속에서 말입니다. 역설·반어나 우화적 접근 등 모든 시적 방법을 동원, 그 타락한 언어들을 뚫고 대상과 삶의 본질을 향한 것이 내 시입니다.』
정치적 구호나 상점의 간판, 심지어 문학과 가까운 광고까지도 본질을 가리거나 왜곡하는 타락한 언어로 보는 오씨는 이번 시집에서도 언어의 해체를 통해 타락한 언어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습관이란 무섭다 북경의 한 반점에/짐을 풀자마자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돌려본다 놀라워라 채널 4에서/목단이란 화장품을 선전하고 있다//천안문에는 진눈깨비가 치고/TV속 중국의 한곳에는 목단이 피고 있다!』(『목단』중)
시의 진술대로 천안문에 진눈깨비가 치고 있었는지, 아니면 천안문 앞에서 눈보라같이 민주화를 외치다 수많은 사람이 진눈깨비처럼 스러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바로 옆 실내에 있는 시청자들은 TV속에서 모란꽃 피는 화창한 봄날을 본다. 꿈같은 언어로 한껏 치장했을 화장품 선전 속에서 본질과는 동떨어진 채 사람들을 편안한 습관 속으로 기어들게 하는 언어를 부수고 사물의 본질, 가두어지지 않은 생생한 삶으로 나아가는데 오씨의 시는 바쳐진다.
『아직도 죽음의 마르지 않는 바람이나/물의 기억은 마른 몸 어디에서/기어이 흐르고 있으리라//나는 낡은 갈대밭을 껴안고 유리창에 내걸며/짐승처럼』(『짐승의 시간』전문)
벌판에서 바람에 휘어지게 울다 이제 아파트 창문에 내걸려 햇빛이나 가리는, 도시 속에 갇힌 우리의 삶의 모습 같은 갈대를, 타락한 언어를 해체하는 또 다른 시적 언어, 혹은 기법을 통해 그 원초적 삶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안타까운 자세가 오씨의 시 세계다.<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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