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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이 지켜본 김정일 중학생 때부터 세습 수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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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 그에게는 숱한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출생지·성장배경·인물의 성격·후계 등장 과정 등 많은 관심거리들이 제한되고 왜곡된 정보들로 인해 불투명하고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중앙일보사가 발행하는 월간중앙 6월호는 북한의 정무원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다 우여곡절 끝에 80년 중반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전 북한고위관리 신경완씨(68·필명)의「곁에서 본 김정일」을 실었다. 신씨가 북한에서 보고들은 김정일에 대한 이 증언은 정보부재의 현실에서 비록에 가까운 가치마저 있다. 월간중앙 6월호의 글을 요약, 정리한다.【편집자주】
◇후계자 옹립=「김일성 혁명의 대를 잇도록 하라」는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49년 사망)의 유언에 따라 김이 다양한 지식과 정치적 식견을 갖도록 육성하는 작업이 김의 중학시절부터 본격화됐다.
김정일이 고등중학교(우리의 중·고교)에 진학할 무렵 발생한 스탈린 격하운동, 연안파·소련파의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은 김일성 및 일족으로 하여금 김정일 후계옹립을 서두르게 하는 자극이 됐다.
일족들은 김정일의 중·고·대학교 성적을 최고로 만들고 김정일의 천재성과 관련된 소문을 퍼뜨렸다.
김정일은 대학졸업시「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서 군의 역할문제」라는 논문으로 정치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대학원이나 학사·박사원에 입학, 몇년동안 공부한 뒤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쓴 논문에만 학사칭호를 부여해왔던 관례를 크게 깨뜨린 특혜였다.
◇정치수업=64년 김일성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은 노동당중앙위원회 비서처 참사실에 배치돼 당 사업전반을 익혔고 1년 후에는 내각수상 참사실로 자리를 옮겨 정부사업을 배웠다. 김은 대학시절부터 아버지 김일성의「현지 지도」에 따라다니는 등 정치 수업을 받았다.
66년초에는 삼촌 김영주가 부장으로 있는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중앙지도과 중앙담당책임 지도원에 임명돼 중앙기관내 당 조직을 장악하게 됐다.
더불어 호위국 업무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66년 가을 김은 대학시절 연애했던 김혜숙과 결혼, 68년 첫딸(현재2남1녀)을 낳았다.
67년 9월 영화예술발전 문제 논의를 위해 열린 정치위원회에서 금은 당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이 됐다.
이로써 노동당 핵심부문인 조직사업 및 사상사업은 각각 김영주·김정일 등 김일성 일족이 장악하게 됐다.
69년초 김은 당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됐다.
부부장이지만 당시 선전부장이던 김국태(김책의 아들)는 입원해 있어 사실상 부장이나 다름없었다.
조직부장인 삼촌 김영주도 약물부작용으로 외국병원에 입원, 거의 공석이 되어 있는 기회를 이용, 김의 대학시절 학교당위원장이었던 박동수를 조직부 제1부 부장으로 앉혀 조직부사업에도 관여했다.
70년부터 김은 당 선전·조직업무를 사실상 장악, 김일성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나 노동당의 역사성에 관련된 일은 직접 지도해 나갔다.
당증 도안과 작성과 김일성의 초상·휘장·훈장의 도안·작성·제작·수여는 전적으로 금이 관장했다.
이때부터 김에게는「영명한 지도가」「친애하는 지도자」라는 찬사가 따르기 시작했다.
◇계모 김성애와의 갈등=71년1월 농업대회에서 김일성이『김성애는 나와 같은 사람이니 나의 명령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당시 여맹위원장)의 전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깎아 내리고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시작했다.
여기에 호위국의 전문섭(현 인민무력부 부부장)·백학림(현사회안전부장) 등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29세의 조직지도부 부부장이던 김정일은 계모 김성애를 냉대하지는 않았으나 어릴 때처럼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여기에 전문섭 등이 김성애의 전횡을 보고하자 김은 당 조직지도부 중앙과장인 장성택(동생 경희의 남편)과 호위국에 김성애의 뒷조사를 할 것을 명령했다.
뒷조사 대상은 평양시당과 여맹.
평양시당은 당시 해군사령부정치위원인 김성애의 첫째 동생 김성갑이 조직비서로 있던 때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여맹은 김성애의 비리를 캐내기 위한 것이었다.
약20여명의 검열원이 동원돼 73년말부터 5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조사는 김일성에게 보고됐고 김일성은 74년6월 평양시당 전원회의 및 여맹중앙전원회의를 통해 김성애 일파를 숙청시켰다.
김성애에 대해서는 공식 석상 출현 금지 및 김일성 자신과의 별거, 자모산 별장에 반연금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김성갑은 함북 아오지탄광으로, 둘째 동생 김성호(황북 도당비서) 는 양강도 임연수 임산사업소 벌목공으로 쫓겨났고 회의당시 평양시당 책임자 강성산은 책임비서에서 경질돼 정무원 교통위원회위원장으로 좌천됐다.
여맹에서 김성애의 심복이자 김성갑의 첩이며 여맹위부위원장인 유경자 등 추종자는 탄광과 농촌으로 쫓겨났다.
◇후계 공식화=71년 4월말 당5기 2차 전원회의에 이어 열린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김영주가 김정일을 당 조직비서에 추천, 후계문제를 반공식화 했다.
72년12월 김일성에로의 권력집중을 법문화한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된 뒤 73년 2월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상반기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당의 핵심인 조직비서자리에 앉게 됐다.
73년 9월4일 열린 노동당5기 7차 회의에서 김일(부주석·84년3월 사망)의 제의에 따라 김정일은 당 중앙위 조직부장겸 조직비서, 선전부장겸 사상비서에 임명됐다.
당권의 핵심인 조직부와 선전선동부가 한사람에게 위임되는 노동당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통해 후계문제는 매듭지어지게 된 것이다.<안성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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