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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문장 이색의 묵향 어린 문헌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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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에 있어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한 시대의 고뇌를 시인은 어떻게 삶과 글로 담아내고 있는가. 그러한 한 시인의 초상을 우리는 고려말의 목은 이색(목은 이색)에게서 보게 된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조가 들어서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의를 지키면서 좌절과 방황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고려 으뜸의 대시인 목은 이색. 그가 피워낸 시혼의 불꽃과 대문장의 묵향을 맡으러 문헌서원(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을 찾았다.
이색은 고려 충숙왕15년(1328년) 5월 고려말 경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던 학자이자 한산 이씨를 중흥시킨 가정 이곡(가정 이곡)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를 하고 벼슬을 할만큼 문재가 뛰어나고 학문이 깊었던 터라 이색의 타고난 재능은 물론 글공부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여덟살에 한산(서천군 한산면)의 숭정산에 들어가 글을 읽고 14세때 이미 성균시에 급제하여 소년 진사가 된다.
16세때에 성균관 구재도회의 각촉부시에서 연거푸 장원을 하여 당대의 으뜸을 움켜쥐게 된다. 각측부시란 글자가 뜻하는 바대로 초에 금을 그어놓고 촛불이 타 들어가기 전에 시를 짓는 백일장이었다. 20세때 아버지가 원나라의 벼슬인 전부가 되었으므로 거기 가서 국자감 생원에 뽑혀 아직 국내에서는 연구가 깊지 않았던 성리학을 공부하게된다.
부친상을 당해 귀국한 그는 상중인 25세때 새로 왕위에 오른 공민왕에게 「시정오사」를 올린다. 첫째, 조세제도를 바로잡을 것. 둘째, 국방정책을 튼튼히 세워 외침을 막을 것. 셋째, 문학을 숭상할 것. 넷째, 교육정책을 세울 것. 다섯째, 혼란세력을 억누를 것 등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현실정치에 눈을 뜨고 일선에 참여하기 시작한 셈이다.

<14세 성균시 급제>
그후로도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과거제도인 회시·전시 (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거)에서도 발군의 실력으로 급제하여 그곳 당대 제일의 문장가 구양현의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고국에 돌아와서 공민왕이 시해되기까지 20년간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 춘추관·예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특히 불교의 유습을 벗어난 유교의 상례를 받아들여 삼년상 제도를 실시토록 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특기할 일은 그가 39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당시 유명무실했던 성균관을 대학문의 전당으로 올려놓은 일이었다. 김구용·정몽주·박상충·박의중·이숭인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을 교수로 초빙하고 이색 자신도 출강하여 열띤 강의와 토론을 벌였다. 전국에서 인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성리학을 비롯한 새 학문의 연구가 날로 널리 퍼지게되었다.
공민왕조차도 이색을 만날 때에는 향을 피우고 자리를 정돈하였다니 그의 학식과 덕망이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임금으로서 신하에게 표하는 경의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묻는 승려 신조에게 공민왕은 대답했다. 『모르는 소리, 목은의 도덕은 여느 사람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곁 껍데기의 학문이 아닌 뼛속을 얻어낸 사람으로 중국에서도 만나기 어렵다. 내 어찌 교만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고.
1389년 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5백년 고려왕조는 위기를 당하게 된다. 우왕은 자리에서 물러났고 최영이 살해된다.
권력의 장악을 기도하고 있던 이성계도 이색의 막강한 영향력에 밀려 최고의 직책인 문하시중을 내주고 창왕의 옹립에도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양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이성계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노골적으로 이색에 대한박해를 가하기 시작했고 제자들에게까지 거세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마침내 62세의 늙은 몸으로 이색은 이초의 의옥에 연루되어 둘째아들 종학, 그리고 제자 권근·이숭인 등과 함께 청주감옥에 갇히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3년에 걸친 귀양살이를 한다.
그사이 둘째아들 종학은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손흥종에 의해 거창에서 살해된다.
1394년 역성혁명이 성공하여 이성계가 조선조의 태조에 오른다. 「태조는 이색을 한산백에 봉하고 두전 일백이십결, 쌀과 콩 1백석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보이나 민심을 의식한 일방적인 회유책이었을 것으로 후세의 사가들은 읽고있다.
상촌 신흠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가 이색을 불러 도움을 청했을 때에도 『망국의 신하가 살기를 바라겠는가』고 거절하고 절도하지 않았으며 「늙은이는 앉을 자리가 없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고 적혀있다.
이색은 태조5년(1396년) 여주의 신륵사앞 여강(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제비여울 근처에서 쓰러져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년간 귀양살이>
배에서 마신 술에 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이성계가 보낸 술이었다고도 하고 이성계의 이름을 빌려 정도전이 보낸 것이라고도 한다. 정몽주나 아들 종학의 죽음처럼 증빙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의 말년의 처절했던 삶을 넘겨다보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묘소는 고향 한산의 기린산 기슭에 쓰여졌고 선조27년(1594년) 묘소의 아래에 문헌서원이 서고 아버지, 아들 종학과 더불어 삼대가 배향된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 홀로 서있어 갈곳 몰라 하노라
그가 남긴 이 한편의 시조는 고려와 조선조의 갈림길에서 절의를 지키는 외로움과 아픔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머흐는 구름(반역)을 보며 반가운 매화(고려왕조의 회복)를 기다리나 홀로서는 지는 해(망국)를 붙잡지 못하는 통곡의 마음이 3장에 응축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이색의 시와 산문은 인조때10대손 덕수에 의해 『목은집』(55권25책)으로 묶여진다. 시집만 35권으로 총4천3백여수나 실렸으니 그의 한 시대의 삶이 노래되어짐이 이렇다 할때 그의 정서와 사상의 넓고 깊음이 또 얼마일 것인가.
그는 고려가 멸망하는 아픔을 「미친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나는 본래 번거로움이 없이 조용히 살고 싶었다네
그러나 바람 속의 구름처럼 자꾸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네
나는 본래 자유롭고 싶었다네
이곳 저곳 가릴 것 없이
그러나 우물물처럼
흐를 수가 없었다네(중략)
돈이 있으면 술에 젖는다 거리낄 일이 무에랴
술이 있으면 꽃을 찾는다 어찌 늦을까 보냐
꽃을 보고 술을 마시고 흰 머리칼 흩날리며
동산에 올라 바람과 달이나 읊조리며 사는구나.
벼슬이 임금의 다음 자리에까지 오른 그였으나 그는 정치가이고 학자이기보다는 고려왕조가 낳은 이 나라 제1의 대문장이었다. 그는 시 이외에도 기, 서, 세, 첨, 용 등 숱한 명문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짐짓 자기의 시가 값이 없다고 시대를 탓해 보기도 한다.
요즈음 물가는 날개 돋친 듯이 뛰는데 내 문장은 돈 값어치가 없구나 물가는 높은데 시의 값이 없는 것은 그 시대의 일만이 아닌 것 같아 읽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한 구절이다.

<「한산팔경」을 노래>
서거정은 「그의 시는 하나의 틀에 매이지 않고 여러 체를 함께 구사했다. 웅대하고 폭이 넓었으며 호화롭고 넉넉했다. 곱고 아름다운가 하면 고결한 멋을 담고 있다. 엄격하면서도 무게가 있었고 오묘한 깊이가 있었다. 법을 지키면서도 아취가 있었다」고 『목은시선』의 서문에 쓰고 있다.
이색은 고향 「한산팔경」을 시로 썼고 중국을 돌아다니며 철철 넘치는 기행시를 짓기도 했다. 그의 무수한 시편들과 후세 학자들의 찬사를 일일이 베껴서 무엇하랴.
묘소와 문헌서원이 있는 기린산 기슭 영모리는 이름부터가 목은을 기리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 서원에는 송시열의 글씨를 새긴 사액현판이 걸려있고 영당에는 그의 초상이 걸려있다.
1989년에 새로 지은 장판각에는 아버지 가정과 목은의 문집 목판들과 전적들이 보존되고 있다.
장항선의 종점 못미처 서천역에서 내려 동목으로 30리쯤가면 한산면과 이웃해 있는 영모리와 만난다. 한산 이씨의 집성부락이기도 한 이곳에 묘소와 서원이 있어 그 가꾸고 받드는 일이 지극함을 엿보게 한다.
당도하니 마침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목은이 바로 이맘때쯤 여기에서 썼을 『소우』가 시흥을 더욱 느끼게 한다.
실낱같은 비가
어두워 오는 작은 마을에 뿌린다
남은 꽃잎 한잎 두잎 빈 동산에 지는데
한가롭기로 홍도 더디게 오는구나
손님이 있으면 문을 열거니와
돌아간 후면 도로 문을 닫는다. 【시인=이근배·사진=오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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