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강사가 수능 출제위원, 공정성 먹칠…수험생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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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언어영역 출제위원에 온라인 입시사이트의 논술강사로 활동한 대학 초빙교수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국가시험인 수능출제위원 선정 과정에 허점이 드러나 시험의 공정성과 신뢰도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수능을 전후해 언어영역의 '출제위원 전공 유출' '예상지문 출제'논란이 문제의 교수 주변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출제위원 선정 허술=수능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12일 "언어영역 출제위원으로 참여한 서울 모 대학 초빙교수 朴모(42)씨가 지난해 M입시사이트에서 본고사 대비 논술 동영상 강좌를 연 강사였던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고 밝혔다.

평가원은 "올해는 강의를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나 朴씨는 이날 오전 현재 이 사이트에 강사로 소개돼 있었으며, 수능 이후 특강 계획까지 잡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가원 측은 엄정해야 할 수능출제위원 선정과정에서 朴씨의 이 같은 경력을 까맣게 몰랐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종승 평가원장은 "朴씨가 학원강사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출제위원에서 제외했을 것"이라며 "출제위원 신분노출을 우려해 합숙소 입소 1주일 전에 출제위원을 최종 선정.통고하다 보니 확인이 제대로 안됐다"고 말했다.

평가원 측은 또 朴씨가 초빙교수이긴 하지만 주당 12시간을 강의하는 전임교원 대우를 받고 있어 출제위원 자격 기준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공정성 논란=朴씨는 칸트에 관한 철학지문(4문항, 9점)을 출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수능 언어영역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지문의 내용은 칸트의 '인간의 양면성'을 다룬 것으로 朴씨의 석사 논문 일부와 비슷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수능 8일 전인 지난달 28일 朴씨가 활동한 입시사이트 게시판에는 '언어영역 출제 교수 한 명의 전공이 철학'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또 이 사이트의 다른 강사는 수능 전 인터넷 강의에서 "칸트 관련 내용을 꼭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종로학원 관계자는 "배점이 큰 언어영역에서 칸트 관련 지문을 예상하고 공부했다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득점에 유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평가원은 "설혹 칸트 관련 정보를 안다고 하더라도 독해력을 주로 묻는 문항이어서 문제 해결에 미치는 영향력은 없다"고 해명했다.

◇수험생 거센 항의=이날 평가원 홈페이지(www.kice.re.kr)에는 "재시험 실시하라"는 글이 빗발쳤다. 수험생 이모씨는 "(시험 직후) 예상지문을 찍었다는 말이 나올 때부터 이상했다"며 "재시험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金모양도 "학교 공부만 충실히 한 학생이 바보되는 시험"이라며 "학원강사를 데려다 출제하고, 교과서로 아무리 공부해도 소용없는 시험으로 어떻게 학교교육을 정상화시키려느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한편 교육인적자원부는 이번 일로 수능의 권위가 크게 훼손됐다며 평가원에 대해 부총리 명의로 기관경고 조치하고, 해당 교수에 대해서도 평가원의 요청이 있을 경우 신분상 조치를 취하도록 할 방침이다.

김남중.강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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