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네스북 오른 최연소 고교 교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사람이 말을 낳지만 말은 사람을 낳는다」는 격언이 있다.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 모여 그 사람과 그 사회의 정서·문화를 이루게 된다는 얘기다.
거친 말, 속된 말, 조잡한 말, 욕설, 외래어 등으로 우리말이 얼룩지면 우리의 문화·역사가 얼룩질 수밖에 없다.
우리문화의 텃밭이면서도 날로 거칠어만 가는 우리말을 바로 지키고 다듬는데 뜻을 세워 30년간 교단에서 우리말사랑·국어순화운동을 고집스레 벌여온 인생이 있다.
지금은 교육부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인 허만길씨(48). 그는 또한 시·소설·희곡 등 여러 문학 장르를 활용하는 동서고금에 없던「복합문학」을 창시해 활발한 문학활동도 벌여 눈길을 끌고있다.
허씨는『국어순화는 국어의 품위를 되찾는 것일 뿐 아니라 국민성·국민문화·국민행위의 도덕성을 정화·함양하는 유력한 방편』이라고 자신이 우리말 사랑운동에 매달려온 이유를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과 이름도 굳이 한글로 써온다.
『우리말에는 겨레의 영혼이 뛰놀고 반만년의 역사가 숨쉬고 조상의 숨소리가 흐르며 우리를 한 울타리로 감싸는 힘이 서려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말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화를 쌓고 경제를 쌓고 우리의 생활을 쌓고있는 것이지요.
허씨는 오늘의 갈등을 극복, 국민이 정신적으로 한 덩이가 되는데도 곱고 따뜻한 말씨 쓰기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말은 일제치하에서 참혹한 탄압을 받았다.「태극기」또는「백두산」이라는 낱말 하나로 엄동설한의 감방에 족쇄로 묶여야했다.
『광복과 함께 우리말은 되찾았지만 우리말을 바로 가꾸고 바르게 이끌어 나가고자 나서는 사람이 드물어 안타까웠습니다. 68년 서울 영등포여고 교사 재직 때 학교에 국어 반을 조직하면서 국어운동을 시작했지요.
그가 국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진주사범(국교교사양성 고교과정) 3학년 때 그의 국어성적이 우수한 것을 본 서예선생님이『중·고교 국어교사를 해 보라』고 권유한데서 비롯됐다.
극빈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이발일 등 고학을 하면서도 중학교에 이어 수석을 차지하고있던 그는 선생님의 책을 빌려 시험준비를 한 끝에 고교 3학년인 18세에 교육사상 최연소로 중학교 교원자격 검정고시(국어 과)에 합격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외솔 최현배 선생은 그를 아끼며 제자로 삼아 스승이 되어주었다. 허씨는 이어 19세 때(62년)역시 최연소로 고교교사자격증을 따냈다.
부산에서 국교·중학교 교사를 거친 그는 67년 서울 영등포여고에 부임하면서 국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고운말 쓰기 운동」이란 구호가 학생들에게 별 반응을 얻지 못해 국어 반을 만드는데도 6개월이 걸렸고 규제 일변도의 행정이 지배하던 때여서 학교장의 최종허락을 받는데도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아가리」「꼰데」「깔치」등 비속어와「사쿠라」등 왜색 말이 범람했고 거리간판은 세계일주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지역사회 게시글자 바로잡기, 고운말쓰기부터 시작해 가두 캠페인, 관공서 게시판에 표어 붙이기 등을 해나갔습니다.
어깨띠를 두르고 창경원 등에 나가 시민들 가슴에「고운말을 씁시다」라는 깃을 달아주는 운동은 예상 밖으로 관심을 끌었지요. 이어 전국 1천여 개 학교·언론사·관공서 등에 국어순화운동을 촉구하는 편지 보내기 운동을 폈습니다.
처음에는 이같은 운동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는 시각이 학교 안에도 있었으나 편지 보내기를 위한 비용이 모자라게 되자 전교생이 우표 및 편지용지 모으기 운동으로 지원해 힘을 얻었지요.
이 활동이 전국규모의 조직적인 국어순화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허씨는 이 활동으로 문교부의 눈에 띄어 71년 각계 원로 13명과 함께 국민교육헌장 이념구현을 위한 문교부 언어생활연구위원으로 위촉받았다. 연구위원으로 허씨는 71년「학생언어생활 순화지도지침(장학자료14호)을 집필, 각 학교로 하여금 언어 순화 반 및 국어상담실 등을 적극 운영토록 해 우리말 사랑운동의 전국 확산을 꾀했다.
71년 허씨는 특유의「복합문학」을 제안,『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라는 작품을 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일본 철공소에서 동맹파업 등 항일활동을 했던 허씨 부친의 자전적 역정을 담고있으며 소설체·서사시·극시·일기체·희곡 등 다양한 양식을 적절한 부분에서 활용하는 독특한 형태다. 허씨는「문학사상 최초의 시도」라고 자부하고있다.
74년 서울경복고로 옮긴 그는「우리말 사랑하기 회」를 만들어 현장운동을 계속했다.
학생들과 함께 그는「예절 말을 다듬어 즐겨 쓰자」는 주제로 전국 5천여 곳에 계몽호소문을 보내 가두캠페인을 벌였으며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꿔 쓰기 등을 했다.
76년에는 학교주변 간판 말 정화에 나서 외국어사용 등 72건의 지적사항을 찾아내 시정토록 계몽하기도 했다. 또「우리말사랑 전국고교생 학술발표회」를 처음 열기도 했다.
그는 75년 8월 대통령특별보좌관이던 박종홍 박사로부터 자문요청을 받아 국어순화운동 확산방안 등을 건의했고, 정부는 76년 범 정부기구인 국어순화운동 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정부차원의 순화운동을 본격화시켰다.
허씨는 경복고 재직중인 78년6월에는 중·고교생 사이에 유행하고있는 저속가요 1백31곡을 분석, 발표해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엄마를 찾으러 댄스홀에 갈까요」등 이들 저속가요는 ▲성행위·애정에 관한 것이72% ▲폭력·음주·흡연에 대한 것이 13% ▲기타 부도덕한 것이15 %등이었다.
그는 선린상고 교사로 있던 81년에는 과자·애완 동물·간판을 분석, 껌은 52%가 외국어이며 개 이름은 45%가 국적불명의 외국어라고 공표,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87년 문교부 국어 과 편수관이 된 그는 독해위주로만 되어있던 국교 국어교과서를「말하기·듣기」,「읽기」,「쓰기」의 3책으로 분화시키는 구상을 해 교육개발원 팀과 함께 5차 교과서 개편에 반영, 실현시켰다.
그의 이같은 인생역정에 대해 일부에서는『너무 심취해 아집이 적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는『국어 황폐화 방지에 조그마한 힘을 보탠 만큼 후회가 없다』는 심정이다.
『앞으로는 프랑스문인들이 프랑스어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말로 발전시켰듯이 문학활동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나가고 싶은 생각입니다.
허씨는 89∼90년 사이『한글문학』지에 시·소설 추천을 받아 문학활동을 하고있다. 88년 10월 한글학회로부터 우리말 사랑운동 유공표창을 받았고 현재 홍익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 최연소 중·고교 교사자격증 취득과 관련, 한글기네스북 한국 편에 올라있다. < 글 김일 기자사진 임영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