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가 움직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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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백담사에서 내려온 전씨는 요즘 등산에 재미를 붙였다.
안현태·허문도·이규호씨 등 1개 소대쯤 거느리고 1주일에 두세 차례 산에 오르는 전씨 부부는 사뭇 활동적이다.
3년전 그가 퇴임했던 2월25일에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날이라고 측근 및 친·인척 24명과 연희동에서 만찬을 갖기도 했다.
종로구 소재 D체육관에서 주1회 운동을 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관람하는가 하면 손자들과 서울대공원에 소풍 나가고 D사 배구 선수, 과거 주치의 등 19명을 만찬에 초대하기도 했다.
부인 이순자 여사도 고양군 소재 갈비 집으로 친지를 초청, 식사를 하고 52회 생일에는 측근 17명과 저녁을 하는 등 서울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연희2동 3통 3반 반상회에도 참석한다. 전씨는 요즘도 매일 새벽 예불을 올리고 있고 회고록 집필을 위해 당시 메모를 정리하고 있다.
전씨가 이처럼「비정치적인」문밖 출입을 활발히 하는 것이 국민들의「면역성」을 기르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같은 동정과는 달리 친·인척 등은 죽은 듯 엎드려 드러나는 행동을 삼가고 있다.
장인 이규동씨(80)는 말많았던 경기도 화성 양산리 소재 농장을 떠나 반포 아파트에서 칩거 중이며 5공 시절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규동씨의 동생 규광씨는 아예 외부 접촉을 끊고 있다.
징역3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가 90년8월 집행유예 14개월만에 법정 구속 돼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또 법정 구속 60일만에 상고심에서 원심 파기 판결과 함께 보석 허가 결정으로 풀려난 처남 이창석씨(40)는 재판부의 결정에 따라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에 주거제한 상태로 묶여 있다.
연희동에선 이씨가 구멍가게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사업이란 게 과거 하던 것의 정리라고 설명한다.
전씨의 친형인 기환씨도 전씨 처가쪽 사람들처럼 엎드려 지내고 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동생에게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다. 아직도 유일하게 구속·수감 돼있는 동생 경환씨는 빠르면 8·15특사에, 늦어도 금년 성탄절 특사에 풀려날 것으로 전씨 쪽에선 예상하고 있다.
경환씨는 지난2월 노 대통령의 취임3주년을 맞아 단행된 특사 때 잔여 형기 4년2개월을 2년1개월로 감형 받아 오는 8·15에는 가석방 요건이 충족된다.
현재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 중인 그는 모범수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친·인척과는 달리 전씨의 장남 재국씨(32)의 동정은 매우 시사적이다.
재국씨는 부친의 명예 회복을 이유로 차기 총선 때 고향인 합천에서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인데 연희동 측에선『반반 정도』라고 한다. 전씨 자신도 그의 출마 설을 묻는 사람에게『고향 사람들은 나오라고 쑤셔 대는 모양인데 결정은 자신이 한일』『그 애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다』라고 해 전혀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재국씨의 정계 진출은 역시 청와대-연희동과의 관계에 따라 방향을 전혀 달리할 수밖에 없어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전씨의 정치 간여가 항상 관심이 되어 왔다. 연희동 쪽에선 물론 그 가능성을 단호히 부인하고 있다.
지난 3월6일 김정남 전 의원이 신당 창당 의향을 노골적으로 타진한 바도 있었다는 것.
그러나 전씨는 10·26직후의 예를 들며『당시는 돈줄과 힘을 휘어잡고도 민정당 창당에 애를 먹었는데 아무 것도 없는 처지에 경거망동 마라』고 힐난했다는 후문이다.
이 밖에도 3김의 정치 발전에 대한 부정적 기능을 걱정했다는 등의 정치적 발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다만 대 청와대 관계를 저해하는 말을 일절 않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일이다.
연희동 관계자들은 5공 그룹의 정치 세력화 문제에 대해『그것은 모르는 일』이라 면서도 광역 의회 이후 어떤 결론을 내릴 뜻을 시사하고 있다.
여권 내에선 전씨가 지난 2월말 외국 여행을 생각했었다가 소문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는 말도 나돌고 있는데 전씨 측은 청와대 쪽의 애드벌룬이라고 펄쩍뛰고 있다.
전씨의 이런 관망 자세 때문에 측근들도 좌표 설정을 못한 채 결심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장세동·안현태·이양우·허문도씨 등 측근 외에 그간 연희동 방문이 잦은 이규호 전 비서실장과 이세기·김정례 전 민정 의원,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고명승 전 보안사령관(육군 대장 예편) 등도 마찬가지.
최근 청와대 쪽이나 전씨 쪽에서는 노-전 관계 개선에 관한 움직임이 보여 주목.
양 진영의 갈등과 대립을 청산할지 모른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빠르면 광역 의회가 끝나는 7월께면 가시적인 무엇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양측 모두 현재의 이런 상태를 마냥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에는 일치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노 대통령이 5공 세력에 대해 배려하는 기색을 여러 번 보였는데 일부에서는 최근 청와대 민정 수석 비서관에 안교덕씨가 기용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고 있다.
육사 11기 출신인 안씨는 노 대통령이 구 민정당 대표 위원 시절 가족 휴가를 같이 갈 정도로 친한 처지였고 역시 동기인 전 전 대통령과도 가깝기 때문에 구 여권 결속의 고리로서 작용하는데는 적임자인 셈.
특히 안씨는 11대 전국구 의원으로서 정치권과 잠시 인연을 맺은 이후는 농개공 사장 등으로 정치권 밖에서 활동했으므로 5, 6공 대결의 와중에서 비교적 초연할 수 있었다.
연희동 측도 청와대와 마냥 대결 자세로 나가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주변의 분석. 다만 연희동 쪽이 먼저 나설 생각은 없다는 정도다.
청와대와 연희동 모두에서는 안씨의 민정 수석 임명이 노-전 회동까지를 포함한 극적인 어떤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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