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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창비』『문지』잘라라|80년 정간물 폐간 회오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1980년7월31일 오전 서울공평동소재 『창작과 비평』편집실. 전날 계엄사 검열단에 『창작과 비평』가을호 교정쇄를 넘겨놓고 검열OK가 나기만을 기다리며 앉아있던 발행인 정해렴씨와 편집자 이시영씨에게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문공부에서 온 보도자료를 보니「창비」가 폐간 당했다. 폐간 통고는 받았는가. 왜 폐간 당했다고 생각하는가.』
난데없는 폐간 소식을 전하며 그 이유를 심층 취재하려는 한 언론사 기자로부터의 전화였다. 같은 날 통의동 『문학과 지성』편집실에 앉아있던 발행인 김병구씨도 라디오 뉴스를 들은 한 문인의 전화에 의해 『문지』폐간 소식을 접했다. 『문지』역시 창간10주년 기념으로 가을호를 다 만들어놓고 검열 OK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80년 7월31일 1백72개 정기간행물 등록취소는 이와 같이 폐간 당사자들도 전혀 모르게 단행됐다. 사회정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날 조치에 대해 문공부는 등록취소 이유로 ▲각종비위·부정·부조리 등 사회적 부패요인이 돼오거나 ▲음란·저속·외설적이거나 사회범죄·퇴폐적 내용 ▲계급의식의 격화·조장·사회불안조성 ▲발행목적 위반 내지 법정발행실적 미달 등을 들었다.
음란 화보·만화 등을 게재하고, 인터뷰기사를 싣고 돈을 우려내고, 능력 있는 회원들 끼리끼리의 글을 싣고 회원들에게 그 「회보」를 몇십 몇백부씩 강매하는 그러한 잡지들은 「사회정화」차원에서 수긍이 간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른바 사회정화란 차원에서 소위 「싹쓸이」에 희생당한 잡지들이 있다. 그 싹쓸이 된 잡지 중에 계간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이 끼게 된 것이다.
또 『월간중앙』 『뿌리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등도 날벼락을 당했다.
『창비』 『문지』가 폐간됐다는 소식에 접한 문인들은 그 날 오후 마치 조문이라도 하듯 두 편집실로 모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문인들은 어떠한 대책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호철·고은·송기원, 그리고 신경림·조태일·구중서·현기영씨 등 많은 문인들이 수감돼 고초를 당하고 있던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저 한잔술로 울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폐간조치 실무를 담당했던 한 문공부 관리는 당시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잡지 리스트를 작성해놓고 문공부·청와대·보안사·안기부 관계자들이 의견일치를 보고 사전경고도 없이 폐간시켰는데도 내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폐간에 대한 항의는 없었다』고. 그러나 그때 상황은 어떠했던가. 「광주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난 직후 아니었던가.
또 정간물 폐간조치에도 불구,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간행물은 물론 관계자를 의법조치 할 방침』이라며 출판사 자체마저도 등록취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던 상태에서 어찌 항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작품발표마당을 잃은 문인들은 단지 술로 울분을 달랠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문예지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 문단에 당시 종합문예지로서 월간으로 『현대문학』 『월간문학』 『문학사상』 『한국문학』과 계간으로는 『세계의 문학』 및 『창비』와 『문지』가 있었다. 『창비』와 『문지』는 순수문학을 내세우며 문학 고유의 영역, 그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으려는 다른 문예지와는 분명 다른 성격을 지녀 값어치 없는 많은 잡지에 섞여 도매금으로 폐간의 시련을 겪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 체제 내지 정권에 껄끄러운 잡지 몇 개를 치기 위해 존재이유조차 찾기 힘든 많은 잡지들이 폐간에 동원됐는지 모른다.
일제와 남북분단에 의한 반공이데올로기 아래서 현실, 혹은 상황에 대한 응전력을 잃고 개인적 상상력 내지 정서의 원고지 칸에만 또아리 틀고 틀어박혀 있던 순수문학주의에 선전포고를 하며 66년초 백낙청씨에 의해 창간된 『창비』. 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에 공무원인 서울대교수 신분으로 서명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났던, 행동하는 지성인 백씨가 이끌고 있고 또 현실참여 문학작품과 이론을 싣고 있던 『창비』는 독재권력에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잡지를 폐간 당하고 88년 복간될 때까지 단행본 출판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창비사의80년대는 줄곧 수난으로만 점철된다. 특히 82년6월 펴낸 김지하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는 창비사에 결정적 타격을 준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민주주의에 얼마나 목말라했으면 활자로라도 그 갈증을 풀고자, 이 시집은 출간된 이틀만에 초판 1만 부가 매진됐다. 그러나 재판작업에 들어간 6월10일 창비사 정해렴·이시영, 그리고 영업부장 장재웅씨 셋은 안기부로 연행돼 2∼4일간씩 호되게 당하고 문공부로 되돌려져 거기서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지형에 대한 포기각서를 쓰게된다.
80년 말 언론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언론사주들에게 써먹기 시작한 「포기각서」가 군소 출판사에도 적용된 예다. 포기각서를 받은 문공부는 그 날로 제책소에 쌓여있던 시집과 지형을 작두 같은 제단기로 갈기갈기 절단해버리고 폐지값으로 창비사에 몇 만원을 건넸다.
또 이 사건으로 창비사는 세무사찰까지 당해 1천만 원의 세금까지 추징당하게 된다.
이러한 수난을 겪던 창비사는 85년12월9일 드디어 출판사등록마저 취소 당한다. 그러나 지식인 2천8백53명의 서명으로 된 「창비사 등록취소 재고요청」등의 항의에 힘입어 86년8월6일 「창작사」란 출판사등록증을 받아 출판업무는 재개할 수 있었다.
한편 김병익·김현·김치수·김주연씨 등에 의해 1970년 창간된 『문지』는 문학·정신·지식의 자유를 추구하며 자유주의 문학을 열고 있었다. 『창비』와 같이 현실적 저항의식은 없었더라도 문학과 학문에 임하는 자유주의적 시각이 독재정권에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창비』와 『문지』폐간 의도 및 주체에 대해 김병익씨는 『「창비·문지를 폐간, 지식인들의 불온스런 거점을 없앰으로써 안전을 기했다」는 한 보고문에서 나타나듯 당시 지식인들의 조직화·세력화에 불편을 느낀 군부가 행한 것으로 문공부가 주체는 아니었다』고 밝힌다.
아무튼 「불온스런 거점」을 잃은 현실참여 내지 자유주의 문단은 정간물 등록을 않고도 1년에 하번씩은 낼 수 있는 무크라는 편리한 출판형태를 통해 5공에 대한 문학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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