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균형(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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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고르바초프가 그전같지 않더라고 했다. 최근 소련을 방문했는 그는 고르바초프의 모습에서 5년전 그를 만났을때의 활력과 낙관적인 인상을 별로 찾아 볼 수 없었다.
고르바초프의 만만치 않은 정적인 옐친과 비교한 얘기도 여운이 있다. 닉슨은 고르바초프가 두뇌에 호소하는 지도자라면,옐친은 가슴에 와닿는 인물이라고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람을 홀리는 쪽이고,옐친은 상대를 감동시키는 형이라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월 스트리트,옐친은 메인 스트리트,…고르바초프는 조지타운의 응접실,옐친은 뉴어크의 공장문…』이라는 비유도 닉슨의 얘기다. 「월 스트리트」는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본산을 상징하며 「메인 스트리트」라면 도회지의 보통사람들이 즐겨다니는 길거리를 말한다. 「조지 타운」은 워싱턴시의 부자들만 사는 동네다. 그곳 부자집의 응접실에 비유된 고르바초프와 공장지대인 뉴어크의 공장문에 견준 옐친은 너무 대조적이다.
닉슨의 충고중엔 이런 것도 있었다. 물론 미국에 대고 하는 말이지만 소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사람」에게만 모든 희망을 거는 외교방식은 「심각한 과오」라는 것이다. 다분히 옐친을 의식하고 하는 말이다.
그는 옐친을 만나는 순간 서방 언론들의 시각이나,틀에 박힌 외교관들의 인물평이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가를 실감했노라고 했다.
닉슨도 과거 여섯차례나 소련을 방문하며 줄곧 만난 사람은 흐루시초프나 브레즈네프,그리고 고르바초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련의 정치환경이 달라진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러분야의 요인을 두루 접촉해야 소련의 진면목과 장래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하나 달라진 것은 국제관계의 룰이다. 냉전시대를 지탱해온 룰은 「공포의 균형」이었다. 그러나 오늘 동서화해시대의 룰은 「이해의 균형」이다. 정치 지도자는 회장 아닌 사장으로서 실무에 밝아 수판을 잘 놓아야 한다.
이런 충고들은 남을 보고 하는말 같지 않다. 우리가 요즘 소련과 외교관계를 트고 정상이 서로 만나는 것은 상대의 주먹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소련 또한 우리를 열강의 일원으로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 두나라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해의 균형」에서 기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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