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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파 … 기꺼이 보수의 짐 질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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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호모 엑세쿠탄스'에 투영된 작가의 정치적 견해는 용서 못 할 문학적 반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욕부터 하고 덤비는 까닭을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몸을 낮춰 살펴보아도 그것은 문학적이지도 문화적이지도 못한 비방이요, 염치없고 상식도 갖추지 못한 정치적 시비로만 들린다. 막말로, 엎어져도 왼쪽으로 엎어져야 하고 자빠져도 진보 흉내를 내며 자빠져야 한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다.'

소설가 이문열(58.사진)씨가 입을 열었다. 2일 정오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나흘 만에 그는 간담회장에 나타났다. 현실 정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출간 전부터 숱한 공방을 일으킨 장편소설 '호모 엑세쿠탄스'(전 3권, 민음사) 때문이다(본지 2006년 12월 7일자 8면, 3월 22일자 6면).

작가는 간담회에서 "나는 재미있는 소설 한 권을 썼다"며 "소설로 읽어 달라"고 수차례 당부했다. 그렇다고 정치적 소신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기꺼이 보수란 소리를 듣겠다. 보수란 짐을 지고 가겠다"고 당당히 밝혔다.

맨 앞에 인용한 문장은 소설 서문의 한 토막이다. 작가는 간담회에서 직접 이 구절을 낭독했다. '엎어져도 왼쪽으로 엎어져야 하고'라는 대목이 유독 걸린다. 그는 "출간 전부터 워낙 말이 많아 내 생각을 적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소설가가 소설을 써놓고 제발 소설은 소설로 읽어 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고약한 시대가 되었다.' 5쪽 분량의 서문 곳곳에서 작가의 언짢은 심사가 드러난다. 간담회는 취재진 50여 명으로 북적였다.

-소설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불경 말씀을 빌리면, 달을 가리켰는데 손가락 끝만 바라봤다. 나는 다른 얘기를 했다. 삽화나 배경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한 내용이 있었을 뿐이다. 원고지 2800장을 썼는데 현실 정치 얘기는 200장이 넘지 않는다. 소설의 서사구조나 미학적 장치, 무엇보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인간 구원의 문제는 배제되고 정치 공방만 벌어졌다. 난감하고 불만스러웠다."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계간지에 발표했던 원고를 얼마나 손봤나.

"많이 고치지 않았다. 특히 정치적 견해란 이유로 문제가 됐던 부분은 거의 고치지 않았다. 문학적 표현을 주로 수정했다(그래서 소설엔 발표 당시 논란이 됐던 '삼치회' 같은 말이 다시 등장한다. 세 가지 바보들의 모임이란 뜻의 '삼치회'는 안기부 대북 파트, 검찰 시국공안, 경찰대공분실 간부로 옷벗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선생은 이미 "소설에 나오는 정치적 견해는 내 견해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소설에 정치적 견해가 반영된 건 사실이지 않은가.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써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이다. 내가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내 발언은, 작가의 견해를 문학작품에서 드러낸 문학 행위다. 사실 1970~80년대 이른바 수작(秀作)이라고 평가받은 소설은 모두 정치적 소설 아니었나?"

-그렇다면 선생의 정치적 견해는 무엇인가.

"내가 정치적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정치적 경향이 보수 반동적이기 때문에 나를 나무란 것으로 보인다. 맞다. 나는 보수이고 우파다. 남이 규정한 것도 있고 나 스스로 감수한 것도 있다. 내가 보수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결정난 것 아니냐. 80년대엔 아니라고 저항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꺼이 보수란 소리를 듣겠다. 보수란 짐을 지고 가겠다. 나같이 미련스러운 사람도 있어야 무언가 되는 게 아니겠느냐."

-소설에 우파의 논리만 있고 좌파의 인식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소설 앞 부분에 좌파가 세상을 한탄하는 대목이 있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내 생각은 이렇다. 이미 충분히 이야기된 것들을 내가 또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번에 좌파의 불평을 싣지 않은 이유도 똑같다. 좌파의 불평은 전(前)시대적인 추억이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대선과 관련한 질문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작가는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크게 앞서고 있다란 질문엔 "1년 전인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나. 아직 상대도 안 나타났는데"라고 비켜갔다. 누가 될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땐 "글쎄"라고 답변을 회피했다. 대선과 관련해 이문열씨가 확정해준 유일한 대답은 "투표는 할 생각"뿐이었다.

작가는 다음달 중순께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본래 1년 계획으로 2004년 연말 도미했던 작가다. 미국행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까지의 미국생활은 이번 소설을 쓰는 데 거의 바쳐졌다. 이번엔 동부로 갈 생각인데, 거기에선 미국에서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볼 참이다. 6개월이 될지 2년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글=손민호<ploveson@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이문열씨가 만든 단어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처럼 인간의 여러 특성 가운데 한 특성으로 작가는 '처형(execute)'을 떠올렸고 '처형자로서의 인간'이란 뜻의 호모 엑세쿠탄스를 창안했다. 그는 인간의 구원 문제를 성찰한 '사람의 아들'의 후속 소설로 '호모 엑세쿠탄스'를 기획했고, 2003년 한 인터넷 매체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매체가 폐간되면서 집필을 중단했던 그는 올 초 계간지 '세계의 문학'에서 연재를 재개했다. 특히 겨울호에 실린 마지막 회는 현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한 몇 구절 때문에 여러 파장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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