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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저팔계의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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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새해 첫날부터 죄송스럽기 짝이 없지만 하소연을 좀 해야겠습니다. 억울한 사정을 참다 못해서입니다. 마침 12년 만에 오늘 딱 하루 우리 동족들에게 관심이 쏠리는 날, 제가 대표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국의 고전 '한비자' 설림(說林)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지요. "원숭이도 우리 속에 가둬 두면 돼지나 마찬가지다(置猿於中, 則與豚同)". 재능도 상황이 맞아야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라나요. 좋습니다. 원숭이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건 인정합니다. 저도 늘 손오공에게 밀렸으니까요. 하지만 그 많은 동물 중에 하필이면 우리가 비교 대상이 돼야 합니까. 사실은 그건 오해랍니다. 우리는 가축 중에 가장 지능지수(IQ)가 높은 동물입니다. 여러분이 영리하다고 감탄하는 견공(犬公)들보다 한참 높단 말입니다.

엉뚱한 비교로 명예훼손을 당하는 건 타고난 숙명인가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도 서운합니다. 차라리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면 일석이조일 텐데….

말 나온 김에 덧붙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만큼 탐욕스러운 족속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먹다 남은 음식을 뒤처리하는 것뿐이랍니다. 삼장법사를 모시고 천축에서 불경을 갖고 돌아온 뒤 부처님께 하사받은 제 직책은 정단사자(淨壇使者)입니다. 부처님 공양에 바친 음식물을 다 처리하는 벼슬이죠. 대단히 죄송하지만 과식으로 소화불량에 걸리는 유일한 동물은 인간이라고 하네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유래했다지요. 너무 모욕적이라 더 말을 않겠습니다. 괜히 제 기분만 더 우울해질 테니까요.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이런 기분을 '꿀꿀하다'고 한다지요? 정말 왜들 그러시는지. 그래도 여러분은 꿈속에서 우리를 못 만나 안달이지 않습니까. 원래 우리는 불평하지 않는 족속입니다. 제 대접도 못 받고 인간들을 위해 궂은 일만 하다가 죽어서도 고사상에서 해탈의 미소로 봉사하지 않습니까.

아참,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돼지띠는 평생 먹을 양식은 타고난다고들 하지요. 좋은 덕담입니다. 하지만 아둔한 제 소견에도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사람의 운명이 어찌 확률 12분의 1에 불과한 띠 하나로 결정되겠습니까. 다 제 하기 나름이죠. 더구나 역술에 정통한 분들 말씀에 600년 만에 온다는 '황금돼지 해'란 말은 주역책 어디에도 없다지 않습니까. 꿀꿀. 정해년(丁亥年) 새 아침 저팔계 올림.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