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초선 의원 노무현이 생각나는 세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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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밑입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는 소망들이 넘쳐나는 때입니다.

춘추관에도 가는 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춘추관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과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담장 너머를 들여다보려면 대개 두 가지 수단을 이용합니다. 휴대전화와 대변인의 일일 브리핑이 그것입니다.

이런 춘추관에서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담장 너머 대통령의 생각과 청와대 밖 여론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때문입니다. 춘추관 기자들이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이 둘 사이의 소통을 중개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간극은 좁혀지기보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는 느낌입니다.

연말을 맞아 이런 인연, 저런 인연으로 엮인 송년 모임이 한창이지만 한두 번 참석한 뒤로는 나가기가 꺼려집니다. 가는 곳마다 반갑지 않은 대답을 추궁받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냐"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물론 답변이 필요한 것도, 제가 답할 수도 없다는 것쯤은 압니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은 답답해집니다.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나도 모르게 빨라집니다.

현재 춘추관에 등록된 기자 수는 292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순번을 정해 대통령 행사를 대표로 취재하는 '풀(pool) 기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춘추관에는 풀 기자들을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생겨났습니다. 풀 기자의 첫마디가 "오늘도 한 말씀 하셨어" 하면 모두가 비상이 걸립니다. "안심해" 하면 중압감에서 해방됩니다.

아시다시피 요즘은 비상이 걸리는 횟수가 잦아졌습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대통령의 말'을 전하다 보면 청와대 안과 밖, 양쪽에서 타박을 듣습니다. "아침마다 신문을 보며 좌절감을 느낀다"는 비서관도 있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느냐"는 비서관도 있습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향하는 눈길을 잡아매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가슴 한구석에 쇳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합니다.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는 등의 대통령 발언을 전하면서는 특히 그랬습니다.

청와대 비서관들 중에는 지금도 1988년 청문회 당시 보통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야당 초선 노무현 의원의 추억을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2002년 승리의 원동력이었다며… 혼자 생각해 봅니다. 초선 의원 노무현이라면 혹시 "부동산 정책만큼은 꼭 성공시키고 싶었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없고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 푼 두 푼 모으며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온 사람들의 좌절부터 위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한 해를 보내며 춘추관에 어울릴 4자성어를 찾아봤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다사다난(多事多難)' 이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춘추관에 어울릴 4자성어를 찾아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종지미(有終之美)' 이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남은 1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의 첫사랑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승희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