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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경찰의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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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종로 일대를 불바다로 만든 9일의 민주노총 시위는 중대사건이었다. 6년여 만에 서울 도심에 퍼부어진 7백여개의 화염병 때문만은 아니다. 형편없이 추락한 공권력의 무게와 위상이 다시 드러나서다.

태평로와 을지로에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던 오후 6시. 그때만 해도 경찰 수뇌부는 안도했다. 일부 시위대가 철수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20분 뒤 상황은 돌변했다. 경찰 무전기에서 "으아, 화염병이다"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현장 지휘관이 다급해 음어 사용을 잊었던 것 같다.

수백개의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보도 블록 조각이 경찰에 쏟아졌다. 더 황당하고 끔찍했던 건 시위대가 진압경찰을 향해 새총으로 쏜 쇳조각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실상의 살상(殺傷)용 너트들이었다. 종로통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됐다.

진압복에 옮겨 붙은 불을 끄려고 껑충껑충 뛰고, 날아온 뭔가에 맞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경찰들…. 경찰은 필사적으로 방패와 몽둥이를 휘둘렀고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든 시위대도 피 튀기는 육박전으로 응전했다.

양쪽에서 1백여명(경찰 40여명, 시위대 50여명)이 다치고 도심 교통이 다섯 시간이나 마비된 상황. 물대포 차 3대가 부근에 있었지만 꼼짝을 안했고 최루탄은 아예 현장에 없었다. 다음날인 10일 아침 최기문 경찰청장은 "앞으로도 최루탄 사용은 안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시위는 언제 누가 죽을지 모를 위험한 쪽으로 격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무탄(無彈)방어'로 버티는 경찰의 태도는 과연 괜찮은 인내심일까. 시위대가 맞짱 뜰 상대쯤으로 여기는 힘없는 공권력을 이제 국민은 원하지 않는다는 걸 경찰이 생각할 때가 됐다.

이상언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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