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7)|<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2)|초년 교육병 시절|이용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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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카모토 대위와 나는 여러 가지 말을 나눴는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항상 자기 옆에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태도로 보아 통역을 시킬 목적만은 아닌 것 같았다.
후일 알게 됐지만 그는 식민지사를 연구했던 사람으로 「조선」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청년 장교였다.
밤마다 팔로군 봉화에 위협을 느끼면서 우리는 평양을 출발한지 10일만에 목적지인 산서성 남쪽 운성에 도착했다. 평양에서부터 1천8백㎞를 온 것이다.
우리들은 곧 교육대에 배속됐는데 나로서는 오카모토 대위가 계속 교육 대장으로 남아 있게돼 다행스러웠다.
운성 일대의 높고 험준한 산은 그 전부가 염산 아니면 염괴였다. 아득한 태고에는 이 일대가 모두 바다였던 것이 분명하다.
운성 북서쪽 2백25㎞ 지점에는 중공의 본거지인 연안이 있고, 남서쪽 2백30㎞에는 서안이 있다. 서안은 한때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한 「서안사건」의 발생지다.
즉 1936년12월12일 오전 5시. 중공군 섬멸전을 독려하기 위해 연안에 갔던 장개석은 자기부하인 장학량에게 구금되어 본의 아니게 「대일전을 하겠다」고 서약했던 것이 바로 「서안사건」이다. 장개석이 대일전을 강요당했던 그 담판 장소에는 연안에서 급히 달려온 주은래가 버티고 있었지만 중화민국의 자존심은 아직도 그 진상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은 그토록 중공군의 활동 무대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항상 팔로군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시간이 없어 못 죽는다는 우리들의 초년병 교육이 시작됐다.
새벽 영하 30도-. 웃통을 벗고 뛰고 있는데 별안간 요란스러운 폭음과 함께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나더니 간이 비행장에 숨겨둔 일본 전투기 세대를 눈 깜짝할 사이에 불태워버렸다.
그날 저녁 구도 내무반장은 『어제 밤 일본 전투기 세대가 착륙했는데 오늘 새벽 미군 기가 기습했다는 것은 이 부근에 반드시 무전으로 미군과 연락하는 간첩이 있다는 증거다』면서 우리들에게 각별한 경각심을 촉구했다.
그것은 나에게 아주 좋은 정보였다. 일본군 탈출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는 나는 이 부근 어느 곳엔가 잠복해 있을 공작원과 연락하면 길이 열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발을 하는 날이다. 교육대에는 20일 간격으로 천바이랑이라는 50대 외국인 이발사가 와서 머리를 깎아주었다.
지난번 나는 눈치를 살피면서 그 이발사에게 우리들은 강제로 끌려온 조선 사람이라는 것과 학대와 멸시가 심해 일본군에 더 있을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사방을 살피더니 내 주머니에 살짝 호떡 한개를 넣어주었다.
오랜 경험으로 그는 신병들이 얼마나 배가 고픈가를 잘 알고 있었으나 누구에게나 그런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한 말에 무슨 감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좀더 그의 마음을 떠봐야겠다고 내가 맨저 말을 걸었다. 『천바이랑,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응,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가.』
그는 이어 소리를 낮추며 『「어서 가자, 어서 가자」고 하는 생각이냐』고 물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서 가자, 어서 가자」고 그가 한 말은 분명히 조선말이 아닌가. 『천바이랑, 지금 그 말 조선말이 아니오. 도대체 어데서 배웠소.』
『우리 인민 해방군에는 조선 사람 다다유….』
『인민 해방군이라니?』
『일본군은 우리 중국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우리 인민을 해방시키는 군대가 인민 해방군이다.』
『그럼 그 인민 해방군에 있는 조선인에게 내 얘기를 했소.』
『그럼, 그럼. 했지 했어…』
『이 동지가 「여기서 중국 군대까지는 얼마나 먼가」 「도중에 일본 경비대나 보초는 몇 군데 있느냐」고 묻더라는 것을 다 얘기했어.』
『만세! 만세! 일이 이렇게 빨리 풀리다니….』
나는 속으로 힘껏 만세를 불렀다.
나는 탈출에 관한 구체적 방안으로 그에게 모레 오전 4시 내가 보초를 서게 돼있는 서문 누각 밑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는 『호적 (좋다)』이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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