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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북핵 해결 불씨 살아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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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북한은 핵실험이란 충격요법을 통해 핵확산이냐 협상이냐를 미국에 요구하고, 미국은 경제봉쇄란 저강도 전쟁으로 핵포기냐 붕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은 '선(先) 제재해제 후(後) 비핵화'를, 미국은 '선 비핵화 후 제재해제 및 관계정상화' 의지를 밝혔다. 북한은 부시 대통령의 한국전쟁 종료 선언 시사 등에 고무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전환에 기대를 걸었지만 미국의 변함없는 '선 핵폐기 요구'에 좌절하고 말았다. 미국은 여전히 제재를 비핵화의 압박수단으로 활용하고, 북한은 제재해제를 비핵화의 전제조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북한은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제재 해제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전환의 물적 징표로 인식하고 우선 해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잘못된 행동에 보상이나 협상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6자회담의 성패는 무엇보다 1단계 말 대 말, 2단계 행동 대 행동, 3단계 북.미 관계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 등 냉전구조 해체에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미국의 선 비핵화 입장과 북한의 선 제재해제 요구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에 달렸다.

1년 이상 끌어온 BDA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6자회담 진전의 관건이다. 내년 초 금융제재 문제를 실무그룹 회의에서 원만히 해결할 경우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본격 협상이 이뤄질 것이다. 다음으로, 핵실험 이전의 '동결 대 보상' 방식의 해결에서 핵실험 이후 동결→신고→검증→폐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보상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북한은 핵실험 이후 달라진 위상을 내세워 핵 프로그램과 핵무기를 세분화해 '살라미전법'을 구사하면서 단계별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 때와 달리 핵동결 신고나 검증절차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보상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끝으로, 북한의 '핵군축' 요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북한의 핵군축 요구를 미국이 수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북한의 핵군축 요구는 핵무기 폐기 단계에서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다자 안전보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속개될 6자회담에서 한국전쟁 종료와 비핵화에 관한 말 대 말의 공약, 그리고 핵동결과 관련한 초기 이행조치에 합의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지면 6자회담은 모멘텀을 이어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용론이 거세질 것이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 이후 잃어버린 12년, 2000년 북.미 공동코뮈니케 이후 잃어버린 6년을 만회하기 위해 북핵 해결의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된다. 핵문제를 조기에 해결하고 '선군에서 실리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김정일 정권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북한이 이번 기회를 또다시 놓칠 경우 핵보다 더 위험한 내부폭발(implosion)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씨를 뿌려놓고 싹을 틔우는 단계로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언급처럼 조기 수확을 위한 '외교예술'을 펼쳐야 할 중요한 시기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