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동성애를 꿈꾸었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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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원제:Love, Sex & Tragedy
사이언 골드힐 지음, 김영선 옮김
예경, 376쪽, 1만9800원

그리스식 사랑법이 표현된 술잔 그림. 성인 남성은 마음에 드는 소년에게 말을 걸고, 선물을 주며 구애했다. 아래 그림은 두 사내가 사냥개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담은 술잔 바닥 그림.

거무튀튀한 이미지 위에 '러브'와 '섹스'를 붉게 휘갈겨 쓴 표지만 봐서는 에로와 스릴러가 가미된 대중 소설같다. 그런데 한 페이지만 넘기면 책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가 몰랐던 고대 그리스의 사랑'이라는 부제가 약간의 힌트가 될까. 저자는 고대 그리스 시대를 파헤친다. 그걸 근거로 현대인들이 '현대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나, 뿌리깊은 진리라 믿고 있는 신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몸짱 열풍이 과연 오늘날 불어닥친 현대병일까. 우리 뇌리에 남아있는 고대 그리스의 미술품들, 체지방률이 낮은 남성의 완벽한 근육질 몸매에 대한 환상이 현대인의 의식.무의식과 무관하다고 누가 단언할까.

요즘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서 몸을 다듬듯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은 체육관에서 근육을 만들었다. 이들은 달리기를 할 때 남근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걸 제외하곤 벌거벗은 상태였다. 현대 남성들이 사우나에서 다른 사내의 맨몸을 본들 역사가 이뤄질 일이 흔하겠냐만, 이들은 공공연히 사랑에 빠졌다. 거기에도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수염이 무성한 성인 남자가 솜털이 무성한, 막 청년기에 접어들어

아름다운 몸을 갖춘 소년에게 구애했다. 오늘날이라면 철창행을 면치 못할 연상연하 동성애가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고차원적인 사랑으로 칭송받았단다.

사랑이 그랬다면, 섹스는 어땠을까. 삽입성교 대신 성인 남성의 남근을 소년의 허벅다리 사이에 끼워넣는 '가랑이 성교'가 정석이었단다. 저자는 '동성애'란 것도 "역사, 이데올로기와 지적 논의가 뒤섞인 현대 사회사상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당시엔 자연스러운 것이었던 그리스식 사랑을 돌아보면 과연 무엇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정체성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식 자연스러움을 뒤집은 건 그리스도교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관리와 칭송의 대상이던 몸은 그리스도교 이후 금욕과 금식의 대상으로 뒤집혔다. 저자는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예수나 바울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가치관을 완전히 역전 함으로써 근본적인 새로움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시작된 사랑과 섹스는 물론, 검투사, 오이디푸스,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논한다. 오늘날 고전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말하는, 다소 학술적인 책이다. 제목에 이끌린 독자라면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를 비교 분석해 설명하는 부분 등에선 어쩌면 꾸벅꾸벅 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의 절반 가량을 할애한 '러브'와 '섹스' 부분에선 눈이 번쩍 뜨일 것이 분명하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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