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13. 생인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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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시집살이였지만 차림새 만큼은 미래의 패션 디자이너다웠다.

'꼭 살아 돌아오게 해 주세요'. 나는 신랑 사진 앞에 물을 떠놓고 아침.저녁으로 기원했다. 일본군 장교로서 사지(死地)에서 싸우고 있는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뿐이었다. 나도 무언가에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다. 생선에도 입을 대지 않았다.

1944년 날이 점점 쌀쌀해지던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전보가 날아 왔다. 해주에 계신 시어머님이 막내를 해산하셔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로 다음날 버스를 타고 해주로 향했다. 시댁에 도착해 보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시어머님은 아기를 낳고 누워 계셨으며, 중학교에 다니는 큰 시누이가 사흘째 어렵사리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밥을 안치고 미역국을 끓였다. 가장 급한 일은 아기 우유를 구하는 일이었다. 노산인 시어머님은 젖이 전혀 나오질 않아 갓난아기에게 겨우 밥물만 먹이고 있었다. 목욕탕에 들어가 보니 아기의 기저귀가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동생들이 있었지만 기저귀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첫날엔 끓는 물에 던져 넣어 대충 빨았지만 사흘째부터는 몸이 둘 이라도 모자라는 판에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기저귀들을 손으로 빨아 널었다.

사람이란 환경에 적응해서 살게 마련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오전 4시반이면 산을 넘어 목장에 가서 아기 우유를 받아 와야 했고 하루 다섯 끼니의 산모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시댁 식구들의 아침 식사가 끝나면 시동생과 시누이 둘의 도시락도 쌌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시아버님 술상을 차리고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중을 들었다.

피로로 지친 몸 만으로도 괴로운데 해주로 오는 기차에서 걸렸던 감기가 악화돼 하루 종일 신문지로 코를 풀다 보니 신문의 잉크독이 올라 코가 통통 부었다. 하루는 손가락 끝이 아파서 살펴보니 손톱 밑이 곪아서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옛말에 시집가서 생인손을 앓으면 재수가 없다고 했는데 걱정이 됐다. 약도 못 쓰고 내버려두었더니 며칠 뒤 그 손톱 밑이 곪아서 손톱이 빠져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김장철까지 닥쳐왔다. 김장을 내 손으로 직접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시어머님께 일일이 순서와 방법을 여쭤보면서 그럭저럭 일곱 식구 분량의 김장을 했다. 손톱이 빠져 엉성한 손놀림으로 무우 채를 썰다 보니 성한 손가락의 손톱이 날카로운 칼날에 잘려 나가기도 했다. 손톱이 빠진 상처에 매운 고춧가루가 스며들어 밤새도록 고통에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 김장 김치는 시댁 식구들은 물론이고 한 동네에 살고있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 만큼 성공적이었다. 김장철이 되면 일정 때 내 손톱을 먹은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나는 지금도 우스갯소리를 한다.

노라·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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