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제발로 안온다”(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반에는 순경이 없다.
대형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지역인만큼 베테랑형사들만 배치된 이유도 있지만 순경으로 전입해 오더라도 석달이 채 지나기전에 대부분 특진하기 때문이다.
원혜준양 유괴살인·오홍근 사회부장 테러·강남병원 폭력배 유혈충돌·김희성군 유괴살인·영동백화점 대표집 강도사건등 최근 2년동안 강남서강력반이 해결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열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랄 정도다. 경찰통계로도 20일에 한번꼴로 강력사건이 일어나 수사본부가 2개 이상 차려진 경우도 허다했다.
18일에도 강력반소속 형사 3명이 특진했다. 영동백화점대표집 억대 강도사건과 학부모를 사칭해 국교 여교사를 납치,추행한 사건을 해결한 공로였다.
하지만 요즘 강력반의 형사 10명은 모두 고개를 숙인채 풀이 죽어 있다.
이형호군 유괴살해사건 수사 잘못의 책임을 물어 서장과 형사과장·형사계장등 간부들이 줄줄이 직위해제당했기 때문이다. 강력반 형사자신들도 서울시경­치안본부로 이어지는 철야감사에 이틀동안 시달려야 했다.
『형호가 죽어 돌아왔으니 할말이 없지요.』
형사들은 개서이후 최악의 돌풍에 모두 허탈하다는 표정들이다.
형호가 유괴된뒤 44일동안의 끝없는 잠복근무가 모두 허사였고 잘못에 대한 비난만 쏟아졌다.
눈앞까지 왔다가 사라진 범인,서울·광명등 범인이 협박전화를 건 공중전화부스 주위를 샅샅이 뒤진 탐문수사….
『범인은 결코 제발로 걸어오지 않는다. 다시 나가서 뛰어.』
재촉하는 반장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물에 적셔진 솜처럼 어깨가 처진 채였지만 새벽속으로 사라져가는 수사팀들의 얼굴은 다시 자신감과 생기가 돌았다.
『범인은 반드시 잡힙니다. 녹음테이프에 의한 성문분석,세명이나 되는 목격자,메모지의 필적등 남겨놓은 범행흔적은 어느 사건보다 많거든요.』
얼마 안가서 이들이 신명난 표정으로 흉악범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끌고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철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