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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더라도 할건 하자/최철주 경제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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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만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괜시리 나서서 문제를 풀어보려다 오히려 혼쭐이 나서 그런 독백들을 한다. 이건 누가 어떻고 하기 전에 사회경험칙상 도출된 우리들의 「생활철학」이다.
지난달 시내버스요금이 1백70원으로 오르자 어떤 지역의 농민들이 일률적으로 시골에 까지 같은 요금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정부에 시정을 촉구했다. 그쪽 농민들은 이야기하기를 자신들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버스를 타는데 어찌해서 아스팔트 위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도시민들과 똑같은 요금을 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시골버스 운수업자들은 농민들에게 요금을 인하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더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도로여건이 나쁜 길을 달리느라 차가 쉬 낡아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관리는 이해가 서로 얽힌 이같은 주장을 조정해보려다 모함과 음해 반격에 걸려 질겁하고 손을 뺐다며 씁쓰레해 한다. 올해 각 경제부처들은 저마다 골치아픈 문제들을 끌어안고 있다. 현안을 잘못 풀어놓았다가는 장관자리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시한폭탄들이다.
건설부가 곧 단안을 내려야 할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문제,재무부의 여신관리제도 개편안,상공부의 재벌그룹 주력기업 선정 등 산업구조 조정방안,농림수산부의 농산물 수입개방 정책 및 추곡수매가의 국회동의제 조정방안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정책의 향방에 따라서는 경제관료들이 「서민들의 내집 마련꿈을 무산시켰다」「농민을 압살」 또는 「재벌을 비호」한다는 어기찬 비난들이 몰릴판이다.
경제논리는 선택의 논리다. 그 시대 상황에서 국민이나 기업,나아가 국가경제에 더 유리한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미 닥쳐온 국제화·개방화 충격을 줄이기 위해 각 경제부처들은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폐쇄적·비효율적·비자율적 정책의 틀을 다시 짜고 있다.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하되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대기업 여신한도 규제완화는 어디까지가 좋을 것인가 등 각각에 대해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관료들은 시작부터 좌절했거나 변신했다. 일부는 분양가 자율화가 부동산값을 턱없이 올려놓는다는 주장에 목을 움츠리고,여신규제 완화가 대기업을 살찌우게 한다는 맹공에 『가만히 있었더라면 중간이나 갈걸』하고 자책한다. 그들은 개선책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이 강하게 무시되고 오로지 부정적인 평가만 부각된데 놀란 나머지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여론이 총론만 있고 각론이 없다』고 비난하면서도 여론을 지독히 무서워한다. 「여론」에 밀려 엘리트 관료들이 자리에서 떨려나가고,때로는 정치적 희생양으로 붙잡혀 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개선책을 지지했다가 분위기를 봐서 목소리를 달리하는 여·야 정치인들도 많고 덩달아 일부 경제관료들도 보호색을 바꾸기도 한다.
「자율화」「규제완화」의 선택은 어느기간중에 나타날 부작용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만한 대가의 지불 없이는 경제현안들이 풀어질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거나 비판으로 일관한다. 때로는 「의견」폭주로 무얼 논의하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문제의 핵심이 실종된다.
그래서 여전히 경제 각 부문에 「규제」는 강화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는 어렵다. 부동산투기·탈세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들이 구별되지 않고 정당하게 부를 축적한 기업인들과 그렇지 않은 기업인들이 한무더기로 공격받고 있는데 대해 경제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어떤 이는 10여채 이상의 집을 가지고 있는 대학장이 TV에 출연해 부동산투기 방지책을 논하고 거짓을 일삼는 일부 정치인들이 경제정의를 역설하는데 기가 질렸다고 한다.
8년전에 발행된 「위기에 처한 미국」은 『쉬운 것만을 선호하도록 방치한 교육이 미국인들을 무장해제시켜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우리나라는 생산직근로자 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어려운 일은 안하고 어려운 결정은 내리지 않으려는 흐름을 본다. 소련에서 여행객들을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무표정·무반응이다. 그들의 직장에 아무리 좋은 건의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열심히 일해도 특별히 좋을 일이 없으니 천성이 무덤덤한 사람인 것처럼 돼버렸다.
외국인·외국자본·외국상품이 몰려오면서 이에 맞설만한 우리의 경쟁력 강화책을 마련하는 많은 관료들이 실의에 빠졌다. 소신도 꺾였다. 그저 이런 압력,저런 여론에 흔들리고 매도되고 눈치보는 바람에 아예 입을 닫았다. 「여론」에 신경쓰는 정치바람도 너무 거세다.
이제 그저 정책의 모양새만 갖추는 것으로 각종 개선안을 매듭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가에서는 『국가에 더 이상 헌신적으로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89년에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만 물러나고만 당시 박승 건설부장관의 케이스는 국민합의 도출과정이 준비되지 않았다는게 결정적인 흠이었다.
이제 관료들이 일대결전의 각오로 새로운 정책개선안을 내놓고 격의없이 논의할 수 있도록 토론의 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경제문제는 1년이 아니라 3∼4년후의 파급영향까지 예측하면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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