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심 없는 인물 뽑아야 합니다"|이중섭 옹<전 경기도 의회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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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30년만에 부활된 지자제선거열기가 서서히 전국의 표밭으로 스며들고 있다.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정치풍토에 정착시키는 역사적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표밭현장엔 아직도 금품과 지연·학연·혈연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정당의 불법적 선거참여도 눈에 띈다.
56년 경기도의원으로 당선돼 도의회의장을 지낸 이중섭 옹(73·고려인삼흥업(주)회장)은 『전국민의 현명한 판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이번 지자제선거의 의의를 강조했다.
-요즘 세간의 관심은 지자제에 쏠린 듯합니다.
『국가가 경제적으로만 발전하면 뭐합니까. 사회·문화적 발전을 이루려면 진작 지자제가 실시 됐어야 죠. 국민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공명선거를 이루어 내지 못하면「자유와 민주」는 공염불이 될 겁니다.』
-공명선거를 해야 한다는 사실 못지 않게 어떤 후보를 고르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지방의회 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가능하면 자기 직업이 있어 돈에 궁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지방의원직은 명예직이기 때문에 금전적 대가가 따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돈이 궁하면 이권에 개입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지자제도, 민주주의도 끝장입니다. 동네사정에 밝고, 경험 있고, 거기에 사심(사심)없는 후보자를 골라야 합니다.
3년 전 일본을 사업차 방문, 나가노현 인삼조합연합회장 집에 머무르던 중 동네에 홍수가 나 제방이 무너지고 집이 침수되는 난리가 났었어요. 그때 회장 집 큰아들이 소방수로 일하면서 지방의회의원이었는데 모든 걸 제쳐 두고 복구사업에 전념하는 걸보고 놀랐어요. 1주일동안 잠자는걸 못 봤어요.』
-이번 선거에 출마한 대부분의 입후보자들이 여-야 당원이거나 또는 지역사정에 밝지 못한 이익단체의 대표들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립니다.『56년 경기도강화에서 출마할 당시 출마자의 상당수가여당인 자유당원이거나 야당인 민주당원이었지요. 제 자신도 자유당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요즘처럼 중앙당에서 노골적인 지원이나 관심은 없었어요. 오히려 지방유지들이 후보자를 추천, 당원일 경우중앙당에 보고만 하는 정도였지요. 중앙당이나 이익단체가 지자제를 먹겠다고 나서면 지자제는 끝장입니다.』
-도의원으로 출마하게 된 동기라도 있으십니까.
『당시 나는 서울에서 대한국민 회·대한농민 회 등 반공활동단체 중앙위원으로 일하면서 공산당과 싸우고 있었어요. 당시 상황이 반공을 국시로 삼은 점도 있었지만 일체치하에서 독립운동과 해방 후 반탁운동을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민족에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었죠.
그런데 하루는 고향인 강화에서 친구 몇 명이 찾아와 도의회의원에 출마, 지방발전에 힘써 달라는 부탁을 하더군요. 상당히 고민했어요. 그때 나이 37세로 젊은데다 의원이 되려면 국회의원이 되야겠다는 야망(?)도 있었고…. 며칠 밤을 설치며 고민하다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위해 뭔가 해보는 게 인생의 보람이겠다 싶어 결정을 내렸지요. 내가 출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에서 출마하려 했던 후보자 3명이 자진사퇴를 해줘 무투표 당선이 뵀죠. 지역발전을 위해 희생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느껴지더군요.』
-젊은 나이에 의장은 어떻게 되셨는지.
『주야를 안 가리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일갈한다고 2년 임기 의장을 맡으라는 겁니다. 당시 45명의 전체 의원중80%가 50대였는데 39세 밖에 안된 나를 민것은 아마도 사심 없이 일한 대가가 아닌가 합니다.』
―재임기간 중 어떤「업적」을 남기셨습니까.
『그때 경기도의 재정자립도가 l7%이었는데 무슨 일을 했겠소. 그러나 주민들의 불편이나 상호협력을 위해선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번은 고향인 강화에 갔다가 동네주민들이 특산물인 화문석을 가족단위로 만들기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한 달여 동안 화문석 제조공장을 세울 건축업자를 찾아다니며 졸랐어요. 결국 한 업자의 도움으로 동네부지에 무료로 공장을 세워 주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분업화한 덕에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죠.』
-도의원으로서의 보람과 긍지는 요.
『봉사자로서의 자부죠. 58년 섣달 그믐날로 기억됩니다. 날이 하도 추워 강물이 언 데다 배에 성에까지 끼어 강화까지 배 운행이 정지돼 나는 물론 뭍에서 고향에 가려는 주민 30여명이 발이 묶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설날을 집밖에서 맞이할 수는 없다 싶어 배 주인과 관할 경찰서장을 찾아가 부탁했더니 두말 않고 배를 띄워 설날을 집에서 맞았지요. 주민들이「의원님」하며 어찌나 기뻐하던지….』
이씨는 도의회의장직을 마지막으로 61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다음해인 62년 자신이 세운 고려인삼흥업(주)에서 30년째 우리나라 홍삼제품수출에 전념하고 있다.
70년 3백50만 달러를 수출, 철탑산업훈장을 받은 이씨는 요즘에도 연 8백만 달러 어치의 홍삼제품을 동남아에 내다 팔고 있다.
신장병으로 약을 복용하기 하지만 아직 새벽5시에 기상, 단전호흡과 체조로 건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씨는 그 동안 정치참여권유가 많았지만 자유당 부패와 5·16세력의 금권정치에 염증을 느껴 모두 거절했다고 했다.
슬하의 4남1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서울 개포동에서 막내 아들(33)부부를 데리고 부인(61)과 함께 살고 있는 이씨는 다음주부터는 이번 선거에 입후보한 예비 의원님들을 찾아다니며 지자제얘기를 좀 해보겠다고 말했다. <글=최형규 기자·사진=오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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