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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부터 법 지켜라/신성순(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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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조업 경쟁력강화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최근 국민의 분노를 살일을 많이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끝에 이런 얘기를 했다.
잇따라 터지는 사건의 대책을 찾기 위해 각계각층의 자문을 받았는데 그중 어느 원로 한분이 이같은 풍토를 고치려면 「혁명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하기에 국민들이 민주주의 안해도 좋다면 한달내에 다스릴 자신이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대통령은 민주주의 틀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신의 소신이라고 덧붙였다.
의원뇌물외유사건이나 수서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생각하면 혁명적 결단을 촉구했다는 어느 원로의 말에도 수긍이 가지 않는 바 아니나 혁명적 방법보다는 민주주의의 틀을 소중히 하겠다는 노대통령의 말에 더 큰 공감이 간다.
그러나 민주주의 틀이란 무엇인가.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 해설을 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법과 질서가 존중되고 사람보다는 제도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을 듯 싶다.
그리고 민주사회에서의 공권력행사는 합법성과 합목적성,그리고 공정성을 생명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려울 터다.
지난 11일 하룻동안 전국에서 2만7백70명이 「기초생활질서 문란사범」으로 적발되어 즉심에 넘겨지거나 벌칙금을 물었다는 기사가 제법 큼직하게 보도됐다.
기초생활문란사범이란 거리에서 침을 뱉거나 흡연이 금지된 지하철역 등에서 담배를 피운 사람,술마시고 소란을 피운 사람 등 말하자면 공중질서를 지키지 않았거나 광고물을 멋대로 달고 뚜껑없는 그릇에 음식을 담아파는 등 가벼운 행정명령을 어긴 사람들을 싸잡아 부르는 말이다.
치안본부는 이날부터 한달간을 기초생활문란사범 특별단속기간으로 정하고 이런 행위에 대한 집중단속을 펴고 있는데 단속 첫날 2만여명이 적발됐다는 얘기다.
이 기사를 보면서 느낀 소감은 일반국민의 공중도덕수준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소나기식 단속에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러있는 경찰의 자세에 대한 개탄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는 잘못이다. 이런 일은 경찰이 단속하기에 앞서 당연히 하지말아야 할 공중도덕이다. 그런 일에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달리는 경찰까지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부끄러워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단속에 임하는 경찰의 자세도 문제다. 도대체 이런 식의 실효도 없고 국민의 불신만 사는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작정인지 묻고 싶다.
침뱉고 꽁초버리는 사람이 많아 거리가 더러워지고 술주정꾼이 많아 질서가 어지러워질 지경이라면,그래서 경찰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면 잘못을 볼 때마다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 옳을 일이다.
기간을 정해 소나기식으로 집중단속을 벌이고 단속기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으로 돌아간다면 그 단속은 하나마나다.
하나마나가 아니라 안하느니만 못하다.
공교롭게 단속기간중에 경찰의 눈에 띄어 처벌을 받은 사람은 잘못을 깨닫기에 앞서 재수없어 걸렸다는 생각부터 할 터이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경찰의 공권력행사 자체가 권위를 잃고 불신만 살터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처벌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어지고 처벌받는 사람이 처벌의 정당성을 인정하기보다 재수타령을 먼저 해서는 민주적 질서확립은 요원한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는게 아닌가 여겨거진다.
경찰이나 지방행정기관의 일제단속이 있을때마다 그런 불평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의원뇌물외유사건이나 수서사건과 같은 큼직한 사건에서도 법의 적용이 공정했는지에 대해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비단 처벌에 관한 문제 뿐만이 아니라 공권력의 자의적 행사로 법질서가 훼손받는 일은 다른 부분에도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의 5·8부동산 조치다. 이 일은 물론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은 것이었던 만큼 아무도 법질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지만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땅을 정부가 강제로 매각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은 명백히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법질서 훼손 행위다.
민간기업인 은행장의 임기를 정부가 멋대로 단임으로 정하고 시중은행장을 교체토록 한 것도 법률이 보장하는 민간기업의 고유업무를 침해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무리 여론이 비등하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도 법률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민주적 질서의 기본틀이다.
이 원칙이 무시될때 사람들은 행동의 기준을 잃게 되고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된다.
법률이 현실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번거롭더라도 법률을 고쳐 집행하고 정해진 법은 반드시 지켜지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온국민이 갈망하는 민주화의 첫걸음이 아닌가 여겨진다.
정부가 한쪽으로는 스스로 법률을 무시하고 다른쪽으로는 정해진 법률의 집행을 외면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일제단속이란 이름으로 범칙자를 양산해 내는 관행이 계속되는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정착은 아직 멀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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