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정치(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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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순임금이 그랬다는 얘기다. 하루는 신하를 데리고 시골에 갔는데 밭에서 김매는 사람들이 누구도 임금을 알아보지 못했다. 신하가 당황해 뭐라고 하려는데 임금은 한사코 말렸다.
공자는 그런 순임금을 두고 『하는 일없이 다스린다』고 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임금의 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것이다.
노자는 나라의 지도자를 네가지 부류로 평가한 일이 있었다. 첫째는 백성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둘째는 백성들이 「두려워 하는 지도자」. 셋째는 백성들로부터 「흠모와 예찬을 받는 지도자」.
그러나 노자는 마지막으로 최상의 지도자를 하나 더 꼽았다.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의 정치를 하는 지도자. 노자는 그것을 「무위의 정치」라고 했다.
실제로 요즘도 그런 나라들이 있다. 얼마전 영국에서 시민들에게 총리가 누구냐는 질문을 냈더니 메이저라고 제대로 이름을 댄 사람은 절반도 안되더라는 것이다. 스위스쪽으로 가면 그 비율은 3분의 1도 될까 말까다.
하긴 내 생업,내 할 일이 바쁜데 그까짓 총리야 아무개면 어떠냐는 생각이리라.
역설같지만 진짜 민주국가에선 「나의 존재」,「나의 역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것이 최상의 덕목이요,국민된 도리라고 믿는 것이다.
엊그제 한 외신에 미국의 어느 국민학교 학생이 부시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해 그가 대통령인 것을 입증해 보이라고 떼를 썼다는 얘기가 있었다. 부시는 생각다 못해 텍사스주 발행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엔 직업란이 없었다. 부시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사인이 새겨진 명함을 건네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화에서 두가지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하나는 그것이 멀리 두메산골 아닌 수도 워싱턴교외의 어느 국민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것. 또 하나는 대통령이 운전면허증을 갖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국가에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세도 부리지 않는 권력자,정치에 눈을 팔지않아도 되는 국민. 그점이 부럽다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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