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11. 현해탄의 스파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신랑이 전쟁터로 떠난 뒤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선에서일본인 경찰은 세련 된 차림새를 보고 스파이로 의심했다.

나는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 신랑이 전쟁터로 떠난 사실을 알렸다. 즉시 서울로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재촉에 홀로 귀국길에 올랐다. 고덴바역을 떠나려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작은 시골역 플랫폼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플랫폼에 들어서는 나를 박수로 맞았다. 평복을 입은 총사령관이 송별사를 낭독한 뒤 내게 증명서를 건넸다.

'이 여인은 일선으로 출정한 ○○포병대 소속 육군 히라야마 가쓰토시(平山勝敏, 남편의 일본식 이름) 대위의 부인으로서,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니 헌병과 경찰은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긴 기차 여행을 끝내고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에 올랐다. 옅은 보라색 레이스 원피스 차림에 하이힐을 신었다. 챙이 넓은 검은색 밀짚모자를 쓰고, 보라색 빌로드로 만든 꽃이 얹혀진 짧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었다.

선실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못 갑니다. 나를 따라오시오"하더니 내 짐을 모두 빼앗아 들고 앞장서는 것이었다. 나를 데려간 곳은 배의 밑바닥에 있는 지저분한 선실이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요!" "고향 서울로 가는 길이오." "본적은 어디요." "경성이오."

그러자 그의 말투가 갑자기 존댓말에서 '해라체'로 돌변했다.

"나는 이동 경찰이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더니 내 짐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책 중에 금서가 한 권 있었는데 다행히 못 알아보는 듯했다.

겨우 숨을 가다듬고 "가방 앞 칸에 내 증명서가 있소"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그 칸에서 증명서를 찾아냈다. 그 글을 읽더니 그는 마치 전신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 경찰관은 고개를 숙인 채 말문을 열었다.

"죄송하다는 말 만으론 저의 무례가 용서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에서 들어온 스파이의 인상 착의에 관한 전문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부인의 모습과 너무 비슷한 것이 사실입니다."

"좋습니다. 모두 없었던 일로 하지요. 그러나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아까 내 본적이 경성이라고 말하니 당신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당신은 일본 본토와 한국을 오가는 연락선의 경찰관입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를 외치면서 조선사람이라는 이유로 무고한 자를 의심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오늘 일을 계기로 조선사람에 대한 당신의 인식이 바뀐다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일어나 일등 선실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그토록 그리던 경성역(현 서울역)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은 채 눈물만 흘리셨다. 긴 여행 끝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울고 계셨다.

"불쌍한 내 딸, 걱정 마라. 내가 너를 지켜주마."

어린 동생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내가 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노라·노 (디자이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