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군 해체이후의 세계(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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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5일은 전후 40여년동안 세계정치를 지배해온 냉전체제의 종식을 공식화한 날로 기록되게 되었다. 소련이 55년 동구 위성국들의 군대를 결합해서 조직했던 바르샤바조약군이 스스로 해체하기로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 거대한 군사조직은 어느 한 참가국이 침략을 받을 때 이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직된 것이다. 이는 미국이 서구와 함께 앞서 결성한 북대서양조약군(NATO)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거대한 군사조직은 냉전시대를 통해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핵공포의 균형」을 이루어 왔으며 나머지 세계를 이념적 군사적으로 양분하여 왔다.
바르샤바군은 그러나 이 기간중 동서간 군사충돌 보다는 조약국가 내부의 독자노선을 억압하는 장치로 활용되어 왔다. 56년 헝가리 봉기를 무력으로 좌절시킨 선례로부터 시작하여 체코의 자유화 물결을 유혈 진압했고 폴란드의 자유화를 협박으로 10년이상 지연시켰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란 미명아래 동구의 독자적 발전을 무력으로 억압해온 결과 지난해 극적으로 확산된 동구의 선거혁명,탈소련의 대세라는 역풍의 잠재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바르샤바 군사동맹의 해체는 실제로는 지난해의 선거혁명으로 이미 실현된 것이다. 25일의 공식선언은 이 기정사실을 공식화하는 행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계는 아직 이 변화가 앞으로의 세계정치에 어떤 영향을 몰고올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못하고 있다. 이상론으로는 인류의 장래를 위협해온 두 군사블록중 하나가 해체되고 나머지 하나 역시 다원화현상을 일으키고 있는이상 전쟁의 공포는 크게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안 민족주의의 충돌과 걸프전쟁이 보여 주듯이 냉전 주역들의 퇴조가 곧 세계 평화를 열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냉전주역중 하나가 와해됨으로써 남은 하나가 군사력을 바탕으로한 영향력을 가지고 국제정치 무대에 패자의 오만을 과시할 위험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걸프전쟁으로 국지패권주의자를 응징하는 군사행동이 미국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명분을 유엔결의에 두고 중동의 온건세력과 서방국가들이 일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키워나가야 할 선례로 보고자 한다.
이라크가 결국 군사작전면에서는 패배했지만 중동의 복잡한 정치사정으로 보아 종전 이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는 작업은 훨씬 더 어렵고,이를 해결하는 원칙과 방향은 앞으로 예상되는 다른 지역의 분쟁해결에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바르샤바군이 해체된 이후의 세계가 하나의 강대국,하나의 군사블록에 의한 전횡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냉전체제의 악몽은 유엔과 같은 국제적 기구를 중심으로한 범세계적 집단 안보체제의 구축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아직은 이상이지만 그런 노력만이 바르샤바군의 해체가 남긴 힘의 공백을 평화적으로 메우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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