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구중궁궐 그 깊은 속을 아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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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 있죠. 궁궐 건축과 사원 건축입니다. 두 분야에서 최고로 통하는 달인이 있습니다. 신응수(64) 대목장(大木匠, 궁궐사찰성곽 등을 건축하는 도편수)과 최기영(62) 대목장입니다. 도편수(대목장)는 정승감이란 옛말이 있죠.이들도 그러해, 망치질 하나에서 집 짓기의 철학까지 막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신 대목장은 경복궁에 93개 동을 짓는 1789억원 규모의 복원 공사, 최 대목장은 184개 동에 5048억원이 투입되는 충남 부여의 백제 궁궐 재현 공사 총감독입니다.묵은 역사에 훅훅 숨 불어넣는 이들의 오늘이 궁금합니다.

<강릉·부여> 글=백성호 기자<vangogh@joongang.co.kr >
사진=권혁재 기자 <shotgun@joongang.co.kr>

신응수 대목장
이병철 회장이 승지원 공사 직접 맡겨

뜻밖이었다. 1984년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 한남동에 승지원을 짓는데 총책임을 맡아 달라는 얘기였다. 당시 42세인 신응수씨는 손을 내저었다. "스승님도 번듯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몇 번이나 고사했다. 결국 비서실에서 이유를 밝혔다. "이병철 회장님께서 직접 고르셨다. '이 사람에게 맡겨라'며 '신.응.수' 석 자를 적어 보냈다"는 것이었다. 더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승지원 공사의 도편수(큰 건축 공사의 총감독)를 맡게 됐다.

공사가 끝날 무렵, 비서실에서 사람이 왔다.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일종의 격려금이었다. "회장님께서 이 말씀도 꼭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회사 돈이 아니라 내 돈으로 주는 것'이라고요." 공사 결과에 대한 '각별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고건축업계에는 소문이 쫙 퍼졌다. '신응수가 승지원 짓고 백지수표를 받았다더라'는 얘기였다. "하하,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소문이 이렇게 생기는 거구나 싶더군요."

그의 고향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 성재리다. 농사 짓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학교까지 20리 길을 걸어 다녔다. "월사금을 제때 못 내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도 공부는 1,2등을 다퉜죠. 특히 수학과 주산을 곧잘 했어요." 중학교를 마쳤지만 앞날이 막막했다. 농사일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었다. 마침 서울에서 사촌형이 내려왔다. "동사무소 급사 자리가 났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난생 처음 기차를 탔다. 17세 때였다.

서울은 무척 컸다. 하지만 고대하던 급사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한 뒤였다. 할 수 없이 목수였던 사촌형을 따라 공사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잔심부름만 했죠. 담배도 사오고, 막걸리도 사오고. 품삯은 전혀 없었어요. 밥만 먹여줘도 고맙다고 해야 할 시절이었으니까." 당시 목수는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게다가 '외상의 악순환'에 시달려야 했다. "주변 구멍가게에 다들 외상 장부가 있었죠. 겨울철에 일거리가 떨어지면 외상을 지고, 봄이 오면 돈을 갚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다 겨울이 오면 다시 외상을 지고…. 끊임없는 외상의 반복이었죠." 당연히 목수가 되리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목수 킬러
"날더러 목수 다 잡아먹을 일 독종이라네요"
불국사·수원성 복원 … 제자 키울 '공사' 남아

그해 겨울, 언감생심 기대도 않던 일거리 하나가 들어왔다. 서울 신촌의 봉원사라는 절이었다. 거기서 당대의 장인(匠人)인 이광규씨를 만났다. 거기서 처음알았어요. 목수가 문화재급 공사도 한다는 걸. 목수 일이 다시 보였고, 한번 배워 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자청해 매일 새벽 마당에 쌓인 눈을 쓸 었다. 물도 데우고 연장도 갈았다. 찬물에 목수들의 양말까지 빨았다. 손등은 늘 터져 있었다. 이런 노력이 이씨의 눈에 들었다. 덕분에 망치질부터 끌질대패질 까지 처음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1961년에는 국보 1호인 숭례문 중수 공사장에 갔다. 거기선 스승의 스승 조원재 선생을 만났다. 당대 최고의 대목장인 그는 숭례문 공사의 도편수 일을 맡고 있었다. 공사장에서 도편수는 절대 권력이다. 아무도 곁에 가질 못했다. 자칫하면 불호령만 떨어질 일이었다. 그래서 밥 먹을 때도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무서웠죠. 그래도 어떻게 해요. 누군가 시중은 들어야죠. 그래서 그는 늘 도편수 옆에 앉았다. 떨려서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하다 도편수가 숟가락 가득 밥을 떴다. 그리고 신씨의 밥그릇에 덜어줬다. 밥 먹고 종이 사와라네~에.어떤 종이인지 감히 묻지도 못했다. 궁리
끝에 크기별로, 재질별로 열댓 장을 샀다. 도편수는 탁자 위에 종이를 폈다. 여기에 초익공집(한옥의 기본 양식)을 그려봐.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덜덜 떨었다. 도면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리는 건 고사하고 볼 줄도 몰랐다. 모르는데요.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도편수는 앞으로 내 집에서 지내라며 그에게 도면 그리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게으름 피우지 않던 그를 도편수가 눈여겨 본 것이다. 도면은 목수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는 징검다리였다. 그렇게 그는 고건축의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나갔다.

그 뒤 불국사 복원공사(70년)에서 처음으로 부편수를 맡았고, 수원성 복원공사(75년)에선 불과 서른 다섯 살의 나이에 도편수를 맡았다. 91년엔 중요무형문화재인 대목장이 됐다. 그에겐 늘 일에 관해선 지독한 사람목수들 다 잡아먹을 사람이란 평이 따라 다녔다. 100년 가는 집이냐, 1000년 가는 집이냐가 내손에 달렸으니까요.

지금 그는 경복궁 복원에 매진하고 있다. 벌써 16년째다. 강원도 강릉에 제재소도 마련했다. 나무를 자를 때마다 내 심장을 베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정선과 강릉 일대 42만 평의 소나무 임야를 사들였다. 이곳 나무들은 생전에 베지 않을 요량이다. 일반 한옥과 달리 궁궐 건축에는 소나무만 쓰입니다. 후대에도 궁
궐 공사에 쓸 적송은 필요할 테니까요.경복궁 공사가 마무리되면 그는 문화재청 앞으로 달려가 1인 시위를 할 참이다. 50대 팔팔한 나이에 와서 어느새 60대 중반이 됐어요. 내 청춘 돌려달라고
외쳐야죠, 허허.그에겐 아직 남은 큰 공사가 있다. 저보다 훨씬 나은 제자를 키워야죠. 그게 장인의 의무잖아요.

최기영 대목장
무한 도전
터도 발견 못한 백제궁궐 복원 작업
일본·중국 고건축 훑으며 뼈대 잡아

3년 전, 최기영 대목장이 경북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을 보수할 때였다. 두 번이나 겹칠한 단청을 약품으로 벗겨내자 뭔가가 나타났다. 1000년 전 그린 모란 한 송이. "온몸에 소름이 쫙 돋더군요. 1000년 전 그림이 숨쉬고 있는 거니까요. 바람이 부는데 꽃이 정말 흔들리는 것 같더군요. 누군가 거기 혼을 불어넣은 게지요." 그는 "그것이 바로 장인 정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사가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수백 년 묵은 절을 해체하자 목재들이 옆으로 틀어져버렸다. "이음새가 빠지면서 갑자기 습기가 들어간 때문이었어요." 난감했다. 틀어진 나무 조각들은 그 자체로 문화재였다. 다른 나무로 대체할 순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목수들에게 "들기름을 바르라"고 지시했다. "들기름은 나무를 부드럽게 하죠. 연해진 나무를 돌려 다시 이음새에 끼워맞췄어요."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어디에도 없는 '비법'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반밖에 못 배웠다. 천하의 대목장도 갈 길은 멀다"고 했다.

그는 7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마쳤지만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대신 3년간 한문 서당을 다녔다. 그 뒤엔 버스 조수도 하고 가설 극장에서 일하며 건들거리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때 가장 부러웠던 게 건설 회사 사장이었어요. 지프를 타고 다녔거든요." 그도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중에서도 목수 일이었다.

충남 예산의 수덕사로 갔다. 예산은 그가 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당대 사원 건축의 1인자로 꼽히던 김덕희.김중희 선생을 찾았다. 형제 간이던 두 선생은 수덕사 복원 공사 뒤 그 곳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하루 품삯이 5원이었거든요. 그걸로는 연장을 살 수가 없었어요." 다른 목수들 연장에는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되었다. 그래서 꾀를 냈다.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면 몰래 톱을 바위에 긁어버리는 거예요." 밥을 먹고 온 목수는 깜짝 놀랄밖에. "그때 슬쩍 가서 '제가 갈아놓을게요' 하는 거지요." 그렇게 톱을 갈아 놓으면 하루쯤은 연장을 만질 수 있도록 해줬다. 대패도 끌도 다 그렇게 배웠다.

서울에 와서 도면 그리는 법을 배울 땐 더했다. 밤에 몰래 창경궁 담장을 수도 없이 넘었다. 깜깜한 밤에 손전등으로 처마를 비추며 고건축의 모양새를 익혔다. "어떤 날은 궁 안에서 꼬박 밤을 새기도 했어요. 아침에 문이 열리면 몰래 빠져나오곤 했죠." 그것은 매우 각별한 경험이었다. "궁에서 밤을 샐 땐 외롭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죠. 그래도 창경궁을 쳐다보면 그 섬세한 아름다움에 탄성이 터졌어."

이때부터 그는 하루 4시간만 잤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남들 잘 때 다 자면 장인이 될 수 없다"는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렇게 배운 결과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전례 없는 도전을 하고 있다. 충남 부여에서 백제 궁궐을 짓고 있음이다. 강원도, 캐나다와 러시아 등지에서 들여온 목재만 40만 재(40t 트레일러 1000대 분)나 된다. "한번 발주로 이렇게 큰 공사는 앞으로도 쉬 없을 겁니다."

1400년 전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를 되살리는 일이다. 결코 쉽지 않다. 백제 궁궐은 아직 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과 중국의 동시대 고건축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문화재 전문위원들과 240여 차례에 걸친 토론 끝에 뼈대를 잡았죠." 완공을 앞둔 정전 안에는 백제 유물에서 발견한 봉황과 용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은 붉은 기둥에 처마 끝이 살짝 들린 게 야하고 화려한 편이죠. 반면 백제의 궁궐은 붉은색 대신 녹색을 많이 썼을 겁니다. 처마 끝도 들리지 않고 밑으로 쭉 뻗는 게 훨씬 엄격한 느낌이고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야말로 당대 궁궐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지였던 거죠."

궁궐 옆에는 아파트 8~9층 높이의 5층 목탑을 세웠다. "궁궐이 서면 부여에서도 더 많은 백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라에 비하면 백제 흔적이 그동안 너무 왜소했잖아요." 그에게 "대표작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없어요. 평가는 후대가 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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