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부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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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올해로 창설 29년을 맞은 건설부의 행정부내 역할은 실로 막중하다. 최대의 현안이 돼있는 주택건설과 도로망의 확충, 상수도원 관리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업무를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이후 잇따른 비리·부정사건과 최근 전국을 희오리바람으로 몰고간 수서지구사건에 서울시와 함께 연루되는등 이른바 불미스런 일에 끼어들어 스폿라이트를 받고있다. 이때문에 건설부가 제2의 같은 복마전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수서지구사건만해도 택지개발촉진법의 법령을 확대해석했다는 책임이 돌아가 장·차관이 물러나는「비운」을 겪기도 했다.>
주택·도로· 수자원· 국토계획·토지등 민생관련의 중차대한 고유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건설부는 지굼까지 자체에서 강관을 단한뎡도 내지 못했다.그만큼 외부에서 영입된 「바깥사람」 들에 의해 최고의 자리가 채워져 온 것이다.

<부내장판 안나와>
이와함께 행정부내 다른 부처와는 달리 유난히 많은 군출신들이 건설부의 최고책임을맡아왔다.
23대째를 맞는 장관중 8명이 장성등 군출신이었다.
초대 박림항씨를 비롯,조성근(2대) 이한림 (7대) 이낙선(10대) 김재규(11대) 고재일 (13대) 김종호 (16대) 권령우(21대)씨등이 그들이다.
이때문에 건설부 강관자리가그동안 고위군출신의 뒷자리로,아니면 지역안배의 케이스로 활용되는등 비전문가로 채워졌다는 평을 면키 어려운 실정이다.
개증에는 일사불란한 군대식의 밀어붙이기로 행정을 추진,가시적인 효과를 본 장관도 더러있다. 경부고속도로를 마무리지은 이한림씨가 대표적 케이스다.
그러나 오늘날 맡고있는 업무에 비해 사람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있어 자체내에서도 3등부처라는 말이 거리낌없이 나오고 있는 현실은 이같은 외풍과 결코 무관치 않다.
건설부 내에서는 이와관련,출범때 이같은 왜곡이 배제돼 있었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이름이 건설부다 보니 새로 오는 강관들마다 무언가 가시적인 건설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긴안목,넓은 시야를 갖지 못하고 눈앞의 「건설」 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더욱이 많은 인· 허가권을 쥐고있어 자칫 「황금의 유혹」 에 젖어들 소지마저 많아 맑은 품토조성이 힘들었다는 자체평가는 이미 공공연한 일로 돼있다..

<정치장관 상당수>
「정치적인」 장관이 적지 않았던 것도 건설부의 발전을 더디게 혹은 뒤처지게 하는 요인이 됐다. 재임기간중 해야할일에는 관심이 없고 지역구 관리성의 민원사업에 치중한 인물들도 있었기 때문이나. 전례용· 장례준· 신형식· 금종호·이규효씨등이 그대표적·사례로 꼽히고 있다.
역대 장관들중 건설부강관답게 각종 건설사업을 가시화한강본인들로서는 군출신들이 단연 앞섰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특기를 발휘했던 셈이다.
이에 따라 이들에 얽혀있는 에피소드들은 지금도 심심찮게거론되고 있다.
5· 16 군사쿠데타이후 서슬퍼런 군정시절 2대 장관을 지낸 조성근씨는 국토개발사업에국토건설단을 투입, 당시로서는가의 「혁명적인」성과를 올렸다.
1군 사령관 출신의 이한림씨는 그중에서도 많은 일화를갖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육사출신의 현역장교들을 공사현강 감독으로 투입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진시황」 이란 별명이 붙었던이씨는 기의 매일 경부고속도로 건설현강을 점검하는 열성을 보였다. 현장으로 가는 도중 배석한 참모에게 궁금한 사항을 질문했다가 만족할만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즉시 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길에버려두고 떠나는 일을 서슴지않았다.
징계는 그 정도선에서그치지 않았다. 귀경 즉시 총무과장을 불러 해당자를 문책토록 지시했다.
이때문에 적지않은 전문 기술직 관리들이 사표를 내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이씨의 이같은 군대식 일방통행으로 인해 건설부내 인재들이 하나 둘 건설부를 떠나게 됐다.
오늘날 경험많은 기술직 엘리트들의 부재현상이 그때부터 비롯됐다는 것이다.
5·16군사쿠데타의 주체세력중 하나였던 이낙선씨(작고)는 또다른 면에서 일화를 남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사적체가심했던 당시 나이든 고참 서기관 (과장) 들을 그만눈다는조건부로 승진시킨뒤 국강급에서 물러나게해 산하단체 임원으로 뒷자리를 봐주었다. 이로인해 「혜택」 을 본 적지 않은사람들은 지금도 이씨를 못잊어하고 있다.
10·26의 장본인인 11대장관 김재규씨 (작고) 는 해외건설쪽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평가들을 하고 있다. 통이 큰 것으로 얘기되고 있는 금씨는 당시 중동진출을 원했던 많은 업체들에 해외건설 면허를 내줘 오일달러를 끌어들이는데 일조를 했다. 물론 이과정에서 거액의 암거래가 있었지 않았겠느냐는게 그를 모셨던 주변사람들의 회고.
전남지사 재직때 광주민주화운동의 뒷마무리를 「잘한」 대가로 건설장관에 발탁된 김종호씨는 전형적인 야전지휘관 타입이었다. 이한림씨가 경부고속도로에 전념했던 것처럼 김씨는 88고속도로에 몸을 내던지다시피 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꼭 현장에들러 공정을 독려했다. 재임때 88고속도로를 준공, 개통테이프를 끊고 싶어했던 그는 현잠을 찾을때면 한 트럭분의 소주를 싣고가 현장인부들에게 베푸는 열성을 보였다.
이같은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88고속도로 개통테이프 커팅을 후임 김성배씨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김씨의 무리한 공기단축노력은 결국 최초의 콘크리트포장도로인 88고속도로의 부실시공으로 나타나 두고두고 말썽을빚었다.
재임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5공비리 청산 청문회에 불려가 쇠고랑신세가된것도 그였다. 서울을지로 재개발사업과관련,특혜를 준 혐의였다.

<직제개편추진 말썽>
6공들어 군출신으로 건설장관이 된 권령각씨는 재임때에도 파란을 겪었다.
직원들을 사병다루듯 해 인기를 얻지못했던 권씨는 직원들로부터 직제개편과 관련, 항명파동을 겪게된다.
그는 건설부직원은 물론 건설부출신 외부인들의 조언과 거센 반발에도 불구, 직제개편을추진하다 말썽을 일으켰는데 결국 50년만의 한강대홍수까지 겹쳐 1년여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권씨는 건설부 고위퇴직관리들의 친목단체인 건설진흥회에자동가입할수 있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직제개펀추진과 관련,기존 회원들로부터 가입이 비토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는 장관새임때 아랫사람들을 무차별로 「괴롭혀」 지금도 권강관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돌리는 직원들이 태반이다.
정치인 출신의 장관들도 건설부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화당당의장을 지내기도 한 4대 장관 전례용씨는 「학업」에 뜻이 없었던 정치장관으로꼽히고 있다.
당쪽 일에 관심을 집중하다보니 장관직에는 소홀할 수밖에없었던 것이다.
전씨는 차관이던 최종성씨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는 국외자의 입장을 취했었다.
9대 장례준씨 역시 건설부사에 남을만한 일을 못했다는평가를 받고 있다.
12대 신형식씨는 장관재임때지역구 민원해뎔에 주력하는등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신씨는 특히 호남출신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했는데 건설부내 임시직까지 호남사람들을 써 타지역출신 직원들의 적잖은 불만을 샀다.
총무처 1급에서 2급으로 강등돼 건설부 국장으로 있다 기획관리실장을 거친뒤 18대 장관으로 앉은 이규효씨는 민간출신임에도 요란한 장관이었다.
사법·행정의 고시양료에 합격한 수재형의 이씨는 경남지사와 건실장관 재임시 지역구를 사전정지하는 민원성 사업을 많이 했다.
이씨는 87년말의 대통령선거를앞두고 「싹쓸이」 파동을 자초, 장관직에서 물러난뒤 13대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경제통으로 건설장관을 지낸케이스는 8대 태완선씨(작고)가 처음이었다.
그는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재임중 그린벨트를 지정했다. 경기 양평에 땅을 갖고있었던 태씨는 그린벨트를 긋고난 뒤에야 뒤늦게 자신의 땅이 그린벨트에 묶인 사실을 알았다. 경황중에 그린벨트를 지정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사욕이 없었던 일화로 지금도 직원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18일 강관이 된 이진설씨는 재무부와 기획원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경제파로기대를 모으고있다.

<소신 못펴고 하차>
학자출신의 건설장관도 최종완(14대)·박승(20대)씨등이 있었지만 뜻을 펴지는 못했다.
박승씨는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건설부로 자리를 옮겨왔으며 『소신껏 일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 는 취임포부와 함께 외욕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나 아파트분양가 자율화와 관련된 몇차례의 발언 끝에 아파트값 폭등의 책임을 뒤집어쓴채 불명예 퇴진했다.
그러나 박씨의 당시 주장은 후임 경제수석 문희갑씨와의 이견으로 묵살됐지만 그때 밀어붙였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호전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충분한 경제학적 이론이 뒷받침됐음에도 파워게임에 밀려더큰 부작용을 낳았다는점이 인정되면서 「아까운」 사람이었다는 아쉬움을 표시하는 직원들이 많다.<이춘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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