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클로즈 업] 순천 竹鶴里서 전시회 서예가 손호근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태고총림 선암사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 전남 승주 땅 조계산은 절 울타리 너머도 자락 자락이 청정도량이다. 북으로부터 달려온 단풍이 어느덧 다다라 산 그림자조차 붉은데, 결 고운 바람이 맑은 햇살을 실어 사위(四圍)의 번뇌를 쓰다듬는다. 불자가 아니라도 이 녘에 드니 절로 마음이 헹구어진다.

선암사 아래 마을의 행정구역상 지명은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대나무 밭에 학이 노닌다고 붙여졌을 법한 이름만큼이나 비속(非俗)한 이곳이 요즘 제법 수런수런하다. 철을 탄 단풍객들에다 마을 한쪽에서 열리고 있는 조그만 전시회 '나무그림전'을 찾는 이들 때문이다.

작가는 마을주민인 서예가 공전(空田) 손호근(孫昊近.50), 작품은 그가 이곳에 죽치고 살면서 계절 따라 틈틈이 그린 20여점의 나무수묵 모듬이다. 전시공간도 그의 작업실 겸 다실(茶室)인 '지은처(智隱處)'. 오는 11일까지 일주일 기한으로 5일부터 시작된 이 전시회의 소문을 듣고 광주.순천.목포.전주 등 호남권은 물론 멀리 서울.부산.대구.대전 등 전국에서 발걸음들이 연일 타박타박 이어지고 있다. 줄잡아 하루 20여명. 화랑전시회와 달리 인원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거의 한 가락씩 하는 예인(藝人)들인데다 촌구석인 점을 치면 꽤나 성황인 셈이다.

"그림은 뭔 그림, 다 핑계여-. 사람덜이 보고자픈게로 숭내를 쪼까 혀본거뿐이제, 속살맹이론 차나 한 잔 하자 이거여."

아니, 전시회라고 벌여놓고 흉내라니…. 겸손치곤 장난기가 넘친다. 그러고 보니 화상이 맑고 천진스러운 게 꼭 소년 같다. 그림이란 것도 뭉턱뭉턱 묵즙이 번진 곳에 삐딱하니 작대기를 그어 소나무라 하지 않나, 갈필로 찍찍 긁어댄 우듬지 몇 가닥에 먹빛이 스쳤나 싶은 걸 신록이라 하지 않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데 그의 신도(?)들은 연신 주억거리며 감탄의 혀를 찬다.

"예술이랑기 모다 장난이여. 하고자픈걸 하능기 장난 아닌감. 지가 가슴으로 저르르항게 이씰쩌그 고것을 나름의 정신작용으로 풀어내능게 예술이제. 그랑께 정신이 빠진 건 장난도, 예술도 아니고 바로 지랄이여. 그림이 쌩짜로 그림 같으면 정신이 뜨악해져 어디 그림이랑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문인화에 대한 일갈(一喝)을 맞고 천천히 다시 뜯어보니 작품마다 그럴싸한 게 뭔가 느껴진다.

공전. 그는 30여년을 오로지 붓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서화가 동원(同源)이니 그림도 치지만 아무래도 본령은 글씨다. 하지만 그의 글씨 역시 '장난'같다. 절대 반듯한 것이 없다. 죄다 삐뚤빼뚤하다. 한 자를 쓰더라도 위 아래 균형을 다르게 하고 방향도, 여백도 다르게 한다. 이른바 조형성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읽어야 되듯이 그의 글씨는 오히려 '보는 글씨'다. 그의 글씨와 그림을 두고 희기(稀奇)하다고들 한다. 그만큼 파격적이란 얘기다. 그가 요즘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통도 없이 제멋대로 치는 '장난'은 절대 아니다. 거기엔 필명이 뜨르르한 스승들의 가르침과 엄청난 인고의 세월이 녹아 있다.

그가 본격적인 서예 공부를 시작한 건 중 2년 때인 1967년 9월부터. 고향인 순천에서 초교시절 글짓기와 그림.서예에 탁월한 재질을 보이자 부친이 광주로 데려가 친분이 있던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선생에게 맡긴 것. 소전 손재형의 제자인 송곡은 당시 국전초대작가로 활동 중이던 고수. "글씨가 되기 전까지는 집과 인연을 끊으라"는 엄명과 함께 송곡에게 맡겨진 뒤 하루 세 시간밖에 자지 않고 스승을 수발하면서 글씨를 배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스승이 쓸 먹물을 한 되나 갈아놓고, 세숫물을 떠다 드리고, 이부자리 개고…. 그야말로 하늘같이 공경하며 한 점, 한 획을 익혀나갔다. 이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호가 여창(如蒼). 추사시절 호남 제일의 명필이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만큼 돼라는 뜻이었다. 일찍이 '글씨의 신동'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의 서재(書才)라 2년 만인 고1 때 전국학생붓글씨대회에서 예서로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받고 그 해 전남미술대전에서 입선(해서)한 것을 시작으로 대한일보.한양대 공동주최 대회 최고상(해서), 대한교련 주최 대회 최고상 등 참가 대회마다 상을 휩쓸었다. 덕분에 고교 3년은 장학생으로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큰 글씨'를 익히려는 욕심은 그를 한 스승 밑에 묶어두지 못했다. 송곡 문하를 떠나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선생 품으로 들어간 게 고2 때. 당시 국전심사위원이던 근원은 전주의 강암(剛庵) 송성용(宋成鏞), 제주의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와 함께 '남도 삼걸'로 꼽히던 인물. 근원은 아겸(亞謙:청나라 趙之謙만 같아라는 뜻)이란 호와 함께 운필법을 처음부터 새로 가르쳤다. "큰 글씨가 되려면 어렵게 익혀 쉽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교시에 따라 죽기살기로 왕희지.구양순.조지겸 등 고법을 익혔다. 스승의 주선으로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의 제자인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와 치련(穉蓮) 허의득(許義得)선생한테 사군자도 배웠다. 하지만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스물에 강암을, 스물 여섯에 소암을 사사했다.

"큰 글씨는 다르지라. 스승님덜이 쓰시능걸 보면 몸이 움찔움찔해질 정도로 글씨가 펄펄 살아 움직이드랑께. 운필이 그러코럼 중요한 거여."

그가 이렇게 큰 스승들 품을 전전하며 터득한 깨달음은 서법은 철저히 익히되 그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득어망전(得魚忘筌). 그건 자기만의 글씨를 갖는 비결이기도 했다. 그래서 실험을 시작한 것이 '보는 글씨, 읽는 그림'. 주제가 떠오르면 자신 안에서 해체를 한 뒤 비틀기도 하고, 뒤집기도 하고, 때론 생략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한자부터 시도해 나중엔 한글로 확대해 나갔다. 나름의 세계가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래서 13년 동안 공모전 출품을 포기한 채 방황과 갈등으로 지냈다. 울분을 삭이느라 술독에 빠져 지내고, 나중엔 아예 속세를 등질 요량으로 출가를 시도하기도 했다. 호를 공전으로 바꾸고 86년 선암사를 정처로 삼은 것도 그 연장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간간이 개인전을 통해 세상을 떠보며 광화사(狂畵師)의 실험적인 붓질을 끊이지 않았다. 89년부터 글씨는 아예 왼손으로 써댔다.

"참말로 징헙디다 잉. 왼손으로 씅께 거짓뿌렁처럼 쏙쏙 작품이 뻽혀 나오는디…, 얼매나 신이 나는지 심화도 쪼깐씩 색혀지더라고."

그의 똥고집이 새삼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해, 대한민국 현대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움켜쥐면서부터였다. 그의 조형서예는 이후 탄력을 받아 단순한 형태를 통한 작업에서 먹의 농담, 채색으로 변화를 주더니 최근 몇년 전부터는 문인화적인 풍미까지 가미하는 등 진화를 거듭하면서 주목의 폭을 넓혀오고 있다. 이번 전시회가 관심을 끄는 것도 이 때문. 한 미술평론가는 그의 글씨를 두고 "예리하기가 번개 같으면서도 서예의 무궁무진한 뒷맛이 짜릿하다"며 "마치 내리 찍는 칼날이 봄기운을 몰고 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에도 하루에 열두 번씩 자신의 빈 밭에 콩도 심어보고, 팥도 심어 본다. 도저한 자유를 향한 실험일 테다.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멩필은 읍는 벱이여. 글씨공부론 나가 안즉 소년잉께 내 글씨를 가즐라믄 환갑까정은 지랄을 혀야 쓰것제."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조용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