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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걸프전에 양다리 작전(특파원코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다국적군이면서 협상에 앞장/“국익우선” 미·아랍 동시접촉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가운데 「뤼시디테」(Lucidite)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명철함」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단어는 프랑스 사람들이 다른 프랑스사람을 공격하거나 칭찬할때 자주 동원된다.
어느 사람의 주장에 뤼시디테가 있다면 그 주장은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고 소견이 분명하다는 뜻으로 그 주장을 한 사람에게는 더없는 찬사가 된다. 반면 뤼시디테가 없다는 평은 모욕에 해당한다.
몽테뉴·루소·데카르트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그들에게 있어 뤼시디테는 프랑스적 사고의 특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자주 듣게 되는 「분명한 것이 아니면 프랑스적이 아니다」는 명제 또한 그러한 자부심의 또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며칠전 프랑스의 슈베느망 국방장관은 걸프전쟁에 관한 대통령의 정책에 불복,사표를 냈다. 대통령보다 자신의 소신에 뤼시디테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논리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볼때 뤼시디테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프랑스 정치인들의 태도는 분명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것은 그렇다고 프랑스의 정책이 항상 뤼시디테를 갖느냐하면 반드시 그런건 아니라는 점이다.
걸프전쟁에 관한 프랑스의 정책에서 다시 한번 그러한 느낌을 확인하게 된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다른 어느나라 정치인들보다 걸프사태에 정력적으로 몰두해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테랑 대통령은 기회있을때마다 TV에 나와 프랑스의 입장을 설명해왔고,입가진 정치인들 치고 나름대로의 소신을 피력하지 않는 정치인이 없었다.
또 관련장관과 특사가 중동관련국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프랑스의 복안을 열심히 설명하고 다녔다.
다각적으로 전개된 프랑스의 외교적 노력의 바탕을 이뤄온 기본정신은 「비겁한 평화가 그래도 전쟁보다 낫다」는 것으로 미국중 다른 우방국들로부터 원칙이 없다는 비난과 함께 「가장 믿기어려운 우방」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겉으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와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의 연계에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는듯 하면서도 사실상 이 두가지의 연계를 토대로한 마지막 중재안을 고집,침략자와 타협을 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됐지만 프랑스의 태도는 여전히 모호한 데가 있다. 마치 한발은 전쟁에,다른 한발은 협상쪽에 디디고 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미군 B­52전폭기의 프랑스영공 통과를 허용하면서도 화학무기를 탑재해서는 안되고 비군사적 공격목표,즉 민간인 등을 공격대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붙여 마지못해 허락한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것이 전쟁에 대한 프랑스의 모호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토록 논리와 원칙을 내세우는 프랑스의 이같은 모호한 태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는 철저한 국익이다. 이라크무기의 4분의 1이 프랑스제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는 과거 이라크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또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아랍국들과 전통적으로 매우 밀접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관계의 손상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미국과의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프랑스가 처한 양다리외교의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다. 전후 처리과정에 참여,국익을 대변할 수 있을 정도의 범위내에서 전쟁참가 규모를 제한적으로 끌고 나간다는 것이 프랑스의 기본입장인 것이다.
둘째는 외교적 독자성에 천착하는 드골주의적 전통이다. 프랑스 정치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대국주의적 환상은 외교적 독자성 유지에 대한 본능적 욕구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정책에 결국 따라가더라도 그것은 결코 추종이 아닌 동조의 성격을 띠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함께,그러나 외교는 따로」라는게 현재 이번 전쟁에 임하고 있는 프랑스 정치인들의 공통인식인 것 같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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