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문인 시, 소설 '장르이동' 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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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여류문인들의 시·소설 사이의 벽허물기가 한창이다.
최근 시인 유안진씨가 첫번째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를 펴냈는가 하면 소설가 박경리·정연희씨가 각각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 『외로우시리』를 펴내는 등 시인이 쓴 소설, 소설가가 쓴 시들이 서점가를 석권하고 있다.
작년초 시인 '신달자씨가 쓴 장편 『물위를 걷는 여자』는 출간 1년도 채 못돼 65만부나 팔리고 영화화돼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25년간의 시작을 통해 한국적 가락으로 버림받은 삶의 편린들을 절제있게 노래하는 시인이란 평을 받은 유안진씨의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문학사상사간)는 안동을 무대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 이야기. 10여권의 시집과 수필집으로 많은 독자를 갖고있는 유씨는 『시와 수필로는 안되는 서사적 인물과 그 생애를 강조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박돌이씨의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은 88년 펴낸 『못떠나는 배』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다. 원주에서 칩거하며 대하소설 『토지』에 몰두하는 동안 순간순간 지나가는 상념들을 시화한 것들이 박씨의 시집들이다. 추억이나 주위의 사물에 받쳐진 솔직하고 담담한 언어들로 하여 『도시의 고양이들』은 대형서점 시집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사회병리현상을 날카롭게 파헤친 『난지도』등으로 확고한 소설적 명성을 쌓은 정연·희씨가 최초로 펴낸 시집 『외로우시리』는 신앙시집.
「영혼의 빈뜰에 심는 사랑의 기도」란 부제가 달린 이 시집은 전도생활에 열중하고 있는 정씨의 신앙생활을 시화한 것이다.
시인이 소설을 쓰고 소설가가 시를 쓰는 장르 전환은 널리 김동리·황정원씨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1934년 시로 등단한 김씨는 이듬해 소실로 재등단했으며 황씨도 시를 쓰다 소설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밖에 윤후명·한수산·유홍종씨 등이 시로 데뷔, 소설가로 전념하고 있다. 또 소설가 이외수·박세현씨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같이 개인적인 장르바꾸기에 88년 도시적 실험파로 불리는 이하석·김수경·이윤택·김영승씨 등 일군의 서인들이 「시인들이 쓴 소설」시리즈로 장편소설집을 펴내 화제가 됐었다. 후기산업사회의 황폐된 도시 문명을 드러내기 위해 기존 시적기법들을 무시해가며 실험시를 쓰던 이들은 기존양식을 무시하기 때문에 소설로의 전이도 가능했던 것.
그러나 최근 중견문인들의 장르 이동은 아직 한 장르로 굳어지기 이전의 초기 몇몇 문인들의 장르이동이나 모든 문학문법을 무시한 실험파들의 장르 이동과는 상황이 다르다.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 시와 수필에서 벗어나 남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끌고갈 수 있다는 해방감에서 소설 「물위를 걷는여자」를 썼다. 그러나 이 소설이 화제가 되고 엄청나게 팔려나가 시인으로서 당혹스런 면이 없지 않다』는 신달자씨의 솔직한 고백처럼 최근에 일고 있는 장르이동은 출판시장 확대에 따른 상업적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씨는 『장르의 확대는 산업화 시대의 문학시장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앞으로 잘 팔리는 작가가 여러 종류의 장르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말하고『지금까지 평론은 문학의 시장성을 「상업주의」 「대중문학」등으로 치부해 왔는데 이제는 이러한 작품에도 시선을 돌려 가치판단을 해야할 때』라고 주장한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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