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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에서 만난 윤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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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목포에서 해남으로 가는 길에 만난 간판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시너바슈즈마트'. 신발가게다. 국적불명의 상표가 번진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건만 좀 심해 보였다. 이것도 재미있다고 해야 하나.

그랬다. 지난 주말 땅끝마을 해남으로 고산 윤선도(1587~1671)를 만나러 간 길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어디나 그렇듯 아파트.상가.모텔마다 기괴한 외국어가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한국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라진 시대를 마냥 탓할 수도 없고….

그러나 행운도 있었다. 고산 시가문학의 산실인 금쇄동을 '날것'으로 만날 수 있었다. 금쇄동은 350여 년 전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72)씨가 손수 자동차를 몰아 금쇄동까지 길을 안내했다.

금쇄동은 고산의 고택 녹우당에서 서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겉만 보면 흔한 야산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산속은 선경(仙境) 같았다. 낯선 이를 압도하는 풍광은 없었으나 바위 하나, 고개 하나에 얽힌 고산의 사연이 비경(秘經)처럼 다가왔다.

마른 낙엽이 깔린 산길을 따라 금쇄동을 올라갔다. 잡목을 헤치고 조금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떡하니 서 있다. 고산이 한문수필 '금쇄동기'에서 '불차(不差)'라고 명명한 돌이다. 천지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넉넉한 마음씨가 묻어났다. 불차에서 200m를 더 오르면 두 개의 바위로 된 석대(石臺)가 나온다. 윗부분이 평탄해 산을 오르다 지친 허리와 다리를 쉬기에 적당하다. 고산은 이곳에 '하휴(下休)'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 아래 휴식처라는 뜻일 게다.

고산의 '작명 게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30만 평 규모의 금쇄동 곳곳에 22개의 이름을 붙였다. 세상의 구차함을 벗어던진다는 '기구대(棄拘臺)', 마음의 근심을 풀어버린다는 '창고(暢高)', 만사의 이치는 하나로 통한다는 '지일(至一)' 등속이다. 자연과 하나 돼 살아갔던 고산이 여전히 살아있는 듯했다.

금쇄동은 한국 문학사의 명소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로 시작되는 '오우가(五友歌)'의 출생지다. 고산은 금쇄동에 9년간 은거하며 모두 26수의 시가를 지었다.

금쇄동은 '어부사시사'의 보길도에 견줄 만하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보길도가 제법 개발된 것에 비해 금쇄동은 고산 사후 지금까지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고산의 묘소도 금쇄동 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답사에 동행했던 문화재전문위원 박경자씨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원형이 남아 있는 게 기적 같다"고 즐거워했다. 현재 해남군청은 금쇄동.녹우당.수정동 등 고산 유적지의 세계유산 등록을 위한 정비작업을 준비 중이다.

금쇄동 마루에 오르니 저 멀리 남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관직에서 물러나 깊은 산에 머물렀던 고산이 보았던 바다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이 아니로다."('어부사시사' 겨울노래)

2006년 달력을 딱 한 장 남겨 놓은 요즘 산이든, 물이든 찾아가 자신만의 명소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또 거기에 이런저런 이름도 붙여 보자. 올 한 해 마음의 더께가 쏙 벗겨지지 않겠는가. 평생 직언(直言)을 고집하다 17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고산의 기개도 이 같은 무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