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사이보그라지만 도벽 있다지만, 괜찮아 그게 사랑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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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이 곧 맛이라면, 박찬욱 감독의 신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7일 개봉)는 입안이 얼얼할 만큼 색소가 듬뿍 든 사탕 같다. 정신 병동을 무대로 환자들의 일상과 몽상을 넘나드는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지만, 알록달록한 색감은 스크린에 넘치도록 화려하다. 넘치는 것은 또 있다. 각종 상징과 비유다. 평소라면 소화불량에 걸릴 법한 표현들이 종횡무진 등장한다. "존재의 목적이 한 개라도 있었으면" "점으로 소멸되고 싶지 않아"같은 대사가 두뇌활동을 자극한다.

자연히 이 사탕을 맛본 소감은 크게 갈릴 듯하다. 혀끝에 두 번 세 번 녹이며 그 맛을 재구성하고 싶어지거나, 아니면 한입 물어보니 별맛 아니더라고 싱거워하거나.

다만 분명한 것은 이처럼 독특한 커플을 쉬 만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선, 머리만 크고 빼짝 마른 소녀 영군(임수정).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믿으며 밥 대신 건전지로 충전해 '하얀맨'(병원 의사.간호사)들이 데려간 할머니를 구해낼 궁리 중이다. 틀니를 끼고 노인네 말투로 변신해 자판기.형광등.괘종시계와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임수정의 연기는 감탄스럽다. 영군의 조력자가 되는 일순(정지훈) 역시 월드스타 비의 스크린 데뷔로 합격점을 줄 만하다. '훔치심(훔치고픈 마음)'이 발동되면 남의 탁구실력이든, 만사에 미안해 하는 습관이든 훔쳐내는 희한한 능력자다. 이 낯설고 황당한 배역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한 임수정(26)과 정지훈(24)을 만났다.

# 영군 vs 일순

우선 인물에 대한 해석부터 들어보자. "영군한테는 할머니가 실질적인 엄마였어요. 그 '엄마'를 더구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자기로부터 떼어내려고 했으니 영군에겐 정신적 충격이었죠. 저는 아주 어렸을 때, 남동생이 태어난 직후 1년쯤 외할머니댁에서 살았대요. 밥도 잘 먹고 이모들이랑도 잘 놀고 그랬대요. 기억은 안 나지만 유아기 때 그런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됐을 수 있죠."(임수정)

"일순은, 처음 시나리오에는 지금만큼도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없었어요. 감독님은 '그게 신비롭지 않냐'고 하셨는데, 저는 궁금해서 계속 질문을 했죠. 왜 도벽이 생겼고, 왜 늘 이를 닦는지. 감독님한테 들으니까, 일순은 어렸을 때 집을 나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본 충격이 컸던 거죠. 그래서 이 잘 닦으라는 엄마의 말을 유언처럼 지키게 되죠. 일순은 어린애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정상인, 좀 모호한 인물이에요. 안티소셜(반사회적 성향. 일순의 증상이다)이 실제로 그렇대요."(정지훈)

그런 일순은 점차 영군의 공상 속으로 함께 들어간다. "영군이 (공상 속에서)사이보그로 변신해서 손끝에서 총알을 뿜으며 공격을 할 때, 일순이 어떻게 대응할지 의논을 많이 했어요. 결국 일순도 영군이 보는 대로 느끼는 걸로 찍었죠."(정지훈)

"이전에는 영군이 혼자 했던 망상을 이제는 일순이 함께하는 거죠. 이게 영화가 말하려는 것 같아요. 상대의 세계를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고 그 세계 속에 들어가는 것, 이게 사랑이라는 것."(임수정)

# 수정 vs 지훈

이렇게 희한한 로맨스를 찍은 결과, 두 배우는 퍽 가까운 사이가 됐다. 먼저 공통점. 박찬욱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아역 배우'인줄 알고 캐스팅한 이들이 실은 속 깊은'애늙은이'란다. 잡지모델 등으로 활동을 시작한 게 각각 1997년, 98년 무렵이니 또래에 비해 긴 경력이다. 같은 작가의 드라마에 출연한 인연도 있다. 임수정의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정지훈의 '상두야 학교 가자'는 모두 이경희 작가의 작품. 이 작가를 통해 서로에 대해 미리 들은 말이 호감으로 작용했다. "촬영 첫날부터, 알고 지내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 같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평소 기질은 반대다. 박 감독은 이들을 "자신감과 낙천성이 최고 자산"(정지훈), "자기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을 하는 사람"(임수정)이라고 평한다.

"맞아요. 수정씨는 정말 섹시해요.(일동 웃음) 지금은 청순하게만 보이지만, 섹시한 매력을 끌어낼 때가 올 거예요. 다재다능한 게 천상 배우예요. 심지어는 춤도 노래도 잘해요."(정지훈)

"석 달 남짓 촬영하면서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어요. 전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마음을 여는 것도 참 서툴죠. 자연인 임수정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깝고. 근데 지훈씨의 상반된 에너지에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주변 사람까지 이렇게 흔들어 놓을 정도면, 본인이 가진 에너지는 어마어마하다는 거죠."(임수정)

# 친절한 찬욱씨 vs 쑥스러운 찬욱씨

촬영 현장에서의 불만을 캐물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묻어났다. "음…서운한 점을 꼽자면, 수정씨가 촬영기간 내내 거의 굶다시피한 거죠. 감독님은 '내가 굶으라고 했냐, 네가 굶는다고 했지'하며 놀렸죠."(정지훈) 임수정은 무려 39㎏까지 감량해서 앙상한 맨몸이 나오는 장면을 거의 촬영 막바지에 찍었다. "제가 고집했어요.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겠다고. 사실 감독님은 감정표현이 거꾸로예요. 많이 놀릴수록 좋아한다는 뜻이죠. 지훈씨한테는 '그렇게 억울하면 여자 감독이랑 해'하고 놀렸죠. 왜냐하면 현장에서 늘 여자 배우, 여자 스태프를 우선시하니까."(임수정)

'사랑한다'는 고백 한번 안 나오는 영화인데도, 두 배우는 이 희한한 남녀의 감정을 주저없이 '사랑'이라고 불렀다. "찍지는 않았지만, 감독님이 엔딩크레딧에 보여주면 어떨까 했던 장면이 있어요. 둘이 늙어서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는데, 영군은 여전히 TV랑 대화를 하고, 일순은 열심히 이를 닦는 거예요. 그랬더라면, 관객들이 이해하기 더 쉬웠을 텐데. 이 둘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지금처럼 상대의 모습을 인정하면서 살았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하면서."(임수정)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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