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논리가 극명하게 지배하는 국제정치 현실을 국제정치학이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먼저 자괴감을 토로했다. 하지만 국제정치학의 세계적 이슈가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
김용구.하영선 교수는 '역사'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면서 한문으로 쓰인 옛 문헌까지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젊은 박수헌.이혜정 교수는 학계-대중 간의 소통과 시각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시민사회 움직임 등으로 넓어진 국제정치의 지평에서 강단 학계가 당면한 고민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 좌담은 최근 출간된 주목할 만한 두 종의 책이 계기가 돼 마련됐다. 한 종은 '국제정치와 한국'을 주제로 52명의 연구자가 모두 네권으로 펴낸 시리즈물로서, 각 권의 제목은 '근대 국제질서와 한반도'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한국''세계화와 한국' '세계 지역의 정치'이다. 다른 한 종은 '국제정치학 교과서'로 꼽히는 '세계정치론'(스티브 스미스 외 지음)을 번역한 책이다. 두 종 모두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 연구자들이 중심이 된 학술모임'국제관계연구회'에서 펴냈으며, 하교수는 이 모임의 좌장격이다. 다음은 좌담의 요약이다.
김용구:한국의 국제정치학은 지적 전통의 단절 속에 5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조선시대 실학 전통의 단절을 우선 꼽을 수 있다. 한문으로 쓰인 문헌을 국제정치학자들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19세기 과제가 여전히 우리에겐 숙제인 상태에서 21세기를 맞고 있다.
하영선:한반도에 국제정치학적 요소가 많다는 것은 역사를 1백년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알 수 있다. 세계 국제정치학의 황금어장으로 연구의 중심이 될 수 있음에도 왜 한국 국제정치학의 빈곤을 얘기해야 하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혜정:이번에 펴낸 시리즈는 강단 학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대중과의 만남이란 점에선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요즘 대학에선 학생들이 대안 강의를 마련해 예컨대 이라크 전쟁 얘기를 따로 듣기도 한다. 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시민 운동가들이 채워주는 것이다.
하영선: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를 한국 국제정치학의 1기, 80년 광주민주화운동까지를 2기, 그리고 90년대 탈냉전까지를 3기로 나눠볼 수 있다. 1기는 완제품 외국이론 수입기였고, 외국 유학자들이 대거 귀국한 2기는 수입대체기였으며, 3기엔 미국이 아닌 제3세계에도 눈길을 돌린 시기였다. 90년대 이후 오늘까지 우리 나름의 국제정치학이 없는가를 모색하는 분위기가 늘어나고 있다.
이혜정:모두 네권으로 된 시리즈를 보면 정책 연구가 빈약함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한.미동맹의 틀에 대한 논문은 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 정책 연구는 없다. 한국 국제정치학의 단골 소재가 남북관계인데 북한 자체에 대한 연구도 빠졌다.
하영선:단기 정책을 내는 것이 국제정치의 꽃이라는 생각도 있는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뿌리다. 이번 시리즈에 사상과 역사가 많이 포함된 것은 그 때문이다.
박수헌:학계와 외부와의 소통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학계 내부의 소통 문제를 먼저 지적해야 한다. 이번 시리즈가 성숙한 토론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김용구:지금 세계 국제정치학의 지형은 미국과 유럽을 대립각으로 해서 크게 변화하고 있다. 유럽은 20세기까지의 국제사회 규범을 고수하려는 반면, 미국은 9.11사태 이후 국제사회 규범을 바꾸려 하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박수헌: 강대국 이론의 맥락을 잘 알아야 하고, 이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의 맥락도 고민해야 한다. 강대국 이론의 역사성과 우리의 역사성이 만나는 곳에서 비판과 수용이 모두 가능하다.
하영선:'한국적'국제정치학을 모색할 때'한국적'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한다. 국가와 민족개념이 형성된 19세기를 살펴보려면 한문 문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반미국적'을 '한국적'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도 경계해야 한다.
박수헌:연구자가 주요 강대국에 몰린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예컨대 이라크 연구자가 얼마나 되는가. 내 전공인 러시아 지역연구만 해도 시장경제와 민주화 등 특정 주제에 쏠리는 경향도 문제다.
정리=배영대 기자<balanc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