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장기투자 연막 치고 '단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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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이 KT&G에서 손을 뗐다. 이미 챙길 것을 다 챙긴 뒤다. 지난해 9월 KT&G 지분을 매입한 아이칸은 1년여 만에 1500억원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올렸다.

5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아이칸은 KT&G 주식 700만 주(4.75%)를 개장 전 시간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주당 6만700원에 팔아치웠다. 총 거래대금은 4249억원.

매매 주문을 처리한 씨티글로벌마켓증권 관계자는 "칼 아이칸 측으로부터 700만 주 정도의 매각 의뢰를 받았다"며 "외국계 기관투자가들 여러 곳에서 사갔다"고 밝혔다.

1년여 만에 수익률 40%='아이칸 파트너스 마스터펀드'는 보유 주식 776만 주(5.26%) 가운데 이날 700만 주(4.75%)를 팔았다. 추정 매입 가격은 주당 4만1000원~4만5000원. 이번 매각으로 1200억~1250억원 정도의 차익을 챙긴 셈이다. 수익률은 40%를 넘는다. 나머지 76만 주를 주당 6만원으로 평가하면 130억원가량을 더 챙길 수 있다. 여기에 환차익도 수백억원대에 이른다. 매입 때보다 원-달러 환율이 60~120원 내렸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배당수익도 짭짤했다.

굿모닝신한증권 박동명 연구원은 "지난해 말까지 120억원 정도의 배당수익까지 챙겼다"며 "이를 모두 합하면 적어도 1400억~1500억원 정도의 차익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아이칸 측의 철수 조짐은 올 8월 22일 리히텐슈타인과 의결권 공동행사 계약을 해지할 때부터 보였다. KT&G 측이 아이칸 측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 3년간 2조8000억원에 이르는 자사주 매입을 골자로 하는 '주주가치 극대화 전략'을 밝히자 아이칸 측은 경영권 위협으로는 더 이상 실익을 챙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증권업계에서는 이번 지분 매각으로 사실상 KT&G의 경영권 분쟁이 종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KT&G 측은 "아이칸의 지분 매각과 관계없이 주주가치 극대화 전략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국 자본 '먹튀' 논란 재연=아이칸 측은 올 3월 한 외국 자문기관과의 인터뷰를 통해 "장기 투자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불거진 '먹튀' 논란을 우려한 것이었다. KT&G 측에는 "7만원에 주식을 사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행동은 모두 주가를 띄우기 위한 포석이었음이 이번 매각으로 확인된 셈이다.

한화증권 이종우 리서치센터장은 "(경영권 방어장치가 없을 경우)투명 경영의 모범사례로 꼽히던 옛 공기업도 투기자본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며 "아이칸은 많은 이익을 봤지만 회사의 장기 성장에는 마이너스"라고 지적했다.

아이칸이 남긴 것=국내 기업을 공격해 막대한 차익을 남긴 사례는 아이칸뿐이 아니다. 1999년 미국계 타이거펀드는 SK텔레콤 지분을 사들인 뒤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을 통해 63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겼다.

2003년에는 소버린자산운용이 같은 방식으로 ㈜SK 주식을 사고 팔아 2년 만에 1조원의 차익을 냈다. 2004년 삼성물산 지분 매입으로 1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긴 헤르메스는 외국계 펀드로선 처음 검찰에 기소되기도 했다.

외국 펀드의 공격은 ▶주주 중심 경영을 유도하고 ▶기업의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공(功)이 있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하지만 과(過)도 적지 않다. 외국 자본의 M&A에 대비하느라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야 한다. 고배당 요구 때문에 기업의 성장 잠재력이 훼손된다는 지적도 있다. 외국계 투기 자본으로부터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제한 의결권을 가진 '황금주' 제도를 도입하거나, 토종 사모펀드를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증권연구원 김형태 부원장은 "외국 자본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되 편법으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는 막아야 한다"며 "장기 투자 자금은 우대하되 시세차익을 노리는 단기 투기 자본을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방어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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