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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대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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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일관계에는 늘 빛과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져 왔다. 우리는 한자와 불교·도자기문화등을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자부심이있지만 임신왜난과 한일합방으로 뼈아픈 침달의 고통을 당하기도했다.
그런 일본에 파견되는 한국의주일대사는 정상걱인 국가간에 교환부임하는 여느 대사와는 다를수밖에 없다.
흔히들 주미대사가 주일대사보다 격이 높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그것은일방적으로 무기·경제지원을 미국에 의존했을때의 얘기다.
요즘은 미국대사야말로 대접도 못받고 골치만 아픈 자리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이를테면 워싱턴의 한국대사는「각국대사 가운데 그저 그렇고그런 한명」 일뿐이지만 일본의 한국대사는 「두명의 대사중 한명」으로 주재국으로부터 평가받는다.
즉 주일한국대사는 동경의 외교관가운데 미국대사 다음으로 일본정부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있다는 얘기다.
그 예로 한국대사는 여느 대사와는 다르게 일본의 외무대신이나 외무성 사무차관을 무시로만날 수 있다. 다음 서열인 공사가일본 외무생의 아주국강을 상대한다. 이는 워싱턴의 한국대사와는「노는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다.주미대사는 상당히 정성을 기물여야 국무부의 아대차관보 정도를만날수 있고 평소엔 국무부 한국과강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펴지않을수 없는 형편이다.

<미국다음 높은 비중>
한일간에는 또 일제36년의 불행한 인연으로 맺어진 인적·문화적 교류의 깊이로 말미암아 다른 어느나라와의 관계에서보다도 많은 비공식 대화통로가 열러있다.
단적인 예로 양국간의 관계가 정상화된 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육사·일본군출신이다.
이런 점이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고 더 부정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한일간의 고유한 역사·지리·문화적 관계는 역대 주일대사들에게 몇가지 공통점을 가져다주었다.
첫째로는 누가봐도 권력의 핵심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일본정부는 한국의 「실력자」가 주일대사에 와주길 노골적으로 희망해왔다.
이 때문에 역대 대통령의 비서실강을 역임한 이가 이후낙·김정렴(박정희대통렴)·이규호 (전두환대통령)대사였고 전두환대통령의 군선배며 은사이기도 한최경녹대사, 노태우대통령의 고교선배요, 외무장관을 지낸 이원경대사가 있었다. 또 3공화국출범의 브레인이요, 내무장관도 했던 엄민영대사등이 막강 파워를 갖고있던 사람이었다.
또 몇명을 빼고는 대부분 일본에서 대학(육사포함)을 나오고 고문에 합격해 법관·관료를지낸 겅력을 갗고 있다.
이러한 공통점들은 주일대사라는 자리가 그동안 어떤 의미를가졌으며 국내정치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됐었던가를 말해준다.
물론 이같은 특징은 65년 국교정상화이후 보다 두드러지는 현상이지만 대표부시절 역시 크게다르지는 않았다.
1949년1월14일 정한경주대수석대사를 필두로 65년 김동조대사까지 16년간의 대표부시절에는모두 13명의 공·대사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 초대 정대사가 1주일이라는 초단명을 기록했고 길게는 금김식대사가 51년부터 57년까지 6년가까이 재임했었다.
단명대사(공관장)는 정대사말고도 적지않다. 3대 신흥우대사가 3개월, 10대 이재항수석공사가 2개월, 11대 엄요섭 수석공사가 6개월, 12대 이동환수석공사가 5개월이었다.
신성모전국방장관도 거창양민학살사건등을 이유로 장관직을 떠나 주일대표부 대사에 임명됐으나 병환으로 인한 입원으로 거의 일을하지 못한채 6개월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표부시절의 가장 큰 화제는역시 유태하대사에 관한 얘기라고당시 일본에 근무했던 전직외교관들은 입을 모은다.
김용직대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인 51년 참사관으로 부임, 59년 특명전권대사로 1공화국이 무너진60년 4월29일까지 근무했었다.
그는 이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하고있을때 부터 비서였던 이유로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부임초기부터 사실상 대사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즘으로 치면 가네마루같은일본정계의 거물들과 자주 술을마셨으며 앉은 자리에서 「두명의직속상관(김용식·김유택)을 쫓아내고 대사가 된 부하」 로 더 유명하다.
5·16혁명이후 61변 부임한 배의환대사시절엔 김종비정보부장과 대평외무장관간의 메모가 있었다.
당시 대사관에서는 김부장에게 오히라외무장관과의 면담에서 청구권 자금과 관련, 결정된 것이 있으면 서로 오해가 없게 메모를해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것이정치문제가 된것을 당시 주일대사관에서는 매우 미안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표부시절의 가장 큰 현안은역시 한일국교정상학였다. 김-대평메모는 한일국교정상화의 조기타결을 서두를수 있는 기반이 됐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급히 서둘렀던 것은 경제적 이유였다.
이후 김대중납치와 육영수여사피습사건에 이르기전까지 한일관계는 경제협력에 중점이 두어졌다.
김동조대사는 국교정상화를 마무리짓고 히로히토 일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최초의 우리대사이기도 하지만 그의 호부호가 분명한 성격과 당시 이동원외무강관과의 부협화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어느 언론은 국교정상·화이후 금대사의 경질이 거론됐으며 대일청구권 자금의 배분에 이해가 걸러있는 재벌기업간의 암투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도한바 있다.
기업에는 청구권자금이 어떤산업에 어떻게 배분되느냐가 곧 특혜가 됐었기 때문이다.
이 청구권자금은 또 한일간의경제유착, 정치자금등으로 연결되는 어두운 측면도 있었지만 초기 우리 경제개발의 밑바탕이 됐던 측면도 부인할수 없다.
엄민영대사는 백남억·김성곤 등 당시 공화당의 중진실력자들과도 경북고동기동창으로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이후락대사는 중정부강으로 서울에 되돌아가기까지 관심이 동경보다 서울에 온통 가 있었다는 평이고 일본의 소련대사관에선을 대어 후일 7· 4공동성명을 만드는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중정부장으로 김대중납치사건을 일으켜 후임 이호대사를 근혹스럽게 만들었다.
다나카(전중) 당시 총리와의 오랜 개인적 친분관계로 발탁된 김영선대사는 역대대사 가운데 일본어를 가강 잘하는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대사로서의 역할수행에 유창한 일본어가 얼마나 득실을 가져다주었는지 모르지만 일제의 관료출신으로 일본에 상당한 인맥이 있었다고 한다.
최경녹대사는 어느 대사보다 한일간의 현안이 가장 많았던 시기를 담당했다.

<이규호씨 특별 대접>
경협자금, 양국정상간 최초의 교환방문, 김만철일가망명사건, 민홍구하사망뎡,후지오 문부장관망언등 양국간 직접현안뿐아니라 KAL007기격추, 랑군사건때도 일본정부와의협력·협조사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규호대사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거의 최초의 비지일파대사로 관심을 끌었다.
이대사는 철학자로서 일본측 인사들에게 「독특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고매한 학자로 대우해주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주일대사의 일은 사실 총리·대신·정계원로들과 골프치고 그들과의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전부일 정도로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자리였다.
그런 주일대사가 바쁘게 움직이면 무엇인가 한일관계에 적신호가 왔다는 것으로 해석됐 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는게 외교가의 공통된 전망이다.
이른바 한일간의 「특수한 관계」는 더이상 존재하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층가운데는 이미 일제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비해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뿐만아니라 우리사회.정치·경제적 체제가 비교적 정상화돼가고있어 더이상 어두운 거래도 쉽게 용납되기 어렵게 됐다.
따라서 한일간의 관계도 그동안의 끈끈했던 관계보다 합리적·이성적·실무적인 관계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주일대사가 더이상 「특수한 존재」 가 아닐때 한일양국은 진정한 미래지향적 동반자관계를 구축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후 서울대를 나왔고 사무관때부터 외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오재배시가 차기 주일대사에 내정된것은 주목할만한 여화에 속한다. <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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