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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중앙 문예」 희곡 당선작|잃어버린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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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더라구요. 그래서 물어봤죠. 그랬더니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아저씨 흰색이나 초록이나 같은 소화제예요. 위 속에 들어가면 똑같아지잖아요.』 (다시 제 목소리를 찾아) 전 그래도 초록색은 먹을 수 없다고 했어요. 내 간의 균들은 초록색을 아주 좋아할 것 같은 거 있죠! 아니, 그보다는 이상한 오기 같은 거였어요. 한번도 웃는 것을 보지 못했던 그 여자의 얼굴에서 화내는 거라도 보고 싶었어요. (힘 빠진 어조로) 사실 고백하건데 난 매 식후에 나오는 알약들을 먹지 않고 휴지통에 혹은 저 창 틈으로 추락시키곤 했어요.
K 이상 심리군. 먹지도 않은 알약을 가지고….
청년 반항하고 싶었어요. 그럴 힘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구요. 국민학교 때 개구리를 해부한 적이 있었는데 내장을 다 들어내 놓은 몸체에서 심장이 박동질 하더군요. 인간인 난 어떤가 알고 싶었어요.
K 그 말들은 어느 나라 언어들인가, 성경책에 있는 말들은 아닌 것 같군.
청년 두려움이죠. (잠시) 참, 오늘 야구게임은 어떻게 됐어요?
K 6대 5야.
청년 매일매일의 숫자 놀음이군요.
K 가강 훌륭한 승부의 세계지. 정신적인 안식처이고.
청년 스포츠 중계, 주식, 물가, 간염의 치수까지….
K (머리를 감싸며) 오만 잡동사니의 숫자들…!
청년 6455, 710, 500, 8958, 62….
K 어떤 때는 내용은 잊어버리고 숫자만 생각이 든다니까.
청년 500!
K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으로 가는 버스 숫자인가, 아니면 내가 산 주식이 오른 값인가?
청년 (흥분하며) 전화번호부는 어떻고요. 「레인맨」이라는 영화에서 자폐증 환자로 나오는 더스틴 호프먼이 전화번호부 책의 숫자를 반이 넘게 외우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전 좀 끔찍하더라구요.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의 머리 속에 있을 숫자들…. 전 구토가 날 지경이었어요. 식도까지 음식물이 꽉 찬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K 그래도 승부의 세계는 숫자들이 비교적 단순하지.
청년 인간의 본질이 유린 당하고 있어요.
K 스트레스도 인간의 본질 중에 속하나?
청년 네?
K 난 스트레스를 스포츠 중계나 직접 내기를 하면서 풀고 있거든.
청년 그래도 근본적인 불안의식은 떨치지 못할 거예요. (힘있는 어조로) 불안의식이 쌓이다 보면 알 수 없는 병들이 생기는 거죠.
K (갑자기 힘차진 청년의 태도가 재미있다는 듯이) 그 정도의 분석이라면 치료약까지 처방해줘야 되지 않겠나.
청년 (확신에 찬 어조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 적당량의 하나님의 언약과 회개의 눈물을 섞어서 만든 특효약이 있죠.
K (두 손을 저으며) 그런 복잡한 조제약은 사양하겠네. 요즘같은 스피드 시대에는 화끈한 액션영화나 스포츠가 어울릴걸.
청년 일시적인 진통제일지는 몰라도 영구적인 치료제는 아니죠.
K 엄격히 말해 영생은 상상의 세계일 뿐이지. 가엾은 인간들이 죽음의 불안의식을 떨쳐버리려고 만든….
청년 성경책을 소설쯤으로 생각하시는 군요.
K 좋아 좋아! 하지만 죽음 이후 영혼의 삶이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라면 현재의 삶 또한 마찬가지지 않겠나. 어떤 때는 성경책이 필요할 때가 있고 한편으로는 람보의 액션이 즐거울 때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6대 5의 숫자놀음이 주는 쾌감에 젖고 싶을 때가 있는 거지. (정색을 하며) 자네도 신을 배반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지 않았나.
청년 이제 기도를 올리고 자야겠어요.
K 오, 지저스 크라이스트! 나도 꽤 피곤하군. (K 침대 위에 드러눕고 청년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작게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그림 4극 『우마차』 흐른다. 음악과 함께 청년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기도가 끝나고 청년 눕는다. 병실 조명 점점 약해져 어두워짐과 동시에 양쪽 벽의 소전등 켜진다. 음악 점점 작아져 사라진다. K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제부터 꿈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서로 무의식의 교차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부서지고 인물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는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K 자 이제 떠날 시간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무대 앞쪽으로 와 선다)
청년 (성경책을 손에 쥐고 일어나 역시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오며) 태양의 발걸음은 재촉하고 있다.
노인 (일어나 앞으로 나온다.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건장하다) 매일 밤 수의를 빠는 나의 어머니…. (세사람 팔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은 채 병실을 천천히 오간다)
K 흐릿한 의식은 기억의 저편에서 낡아빠진 도시의 한 모퉁이를 방황하고 있다.
노인 잿 속에 사그러져가는 불같은 생명.
청년 시들어버린 내 젊음.
K 잔인한 미소 속에 유예된 시간들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노인 내 어머니의 자장가는 어디로.
청년 내 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K 내 누이의 따뜻한 손길은 어디로.
노인 (양손을 천천히 올리며) 피맺힌 만주의 하늘, 1934년 731부대.
청년 (양손을 천천히 올리며)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꿈꾼다.
노인 (허공에서 두 손을 떨며) 히로시마에서 일그러져 버린 내 어머니의 육신.
청년 (허공의 손을 불끈 쥐며) 욥의 반항을 찬양한다.
노인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지리산에 던져진 내 아들의 영혼.
K 상처를 벌려 피 흘리는 고향.
청년 아, 골고다의 숭고함.
노인 나는 주인 잃은 혁명.
K 나는 부서지는 창.
청년 십자가의 영광이여!
노인 고향의 바닷가.
K 나는 이글대는 태양. 죽은 누이의 노랫소리.
노인 박제된 하늘. (절망에 찬 눈빛으로 허공을 향한다)
청년 (노인을 외면하며) 오, 하나님!
K (노인을 향해 아무런 표정의 동요 없이) 고흐는 머리에 방아쇠를.
노인 악! (비명소리와 함께 주저앉는다. 온몸을 비튼다. 청년과 K 노인에게로 달려간다)
청년 아버지!
K 아버지! (문쪽을 향해) 의사! 간호원! (의사, 수련의, 간호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가면을 쓰고 느린 동작으로 거만스럽게 등장한다. 의사가 실물보다 과장된 주사기를 노인에게 들이대면 노인 몸부림치고 나머지 사람들은 팔 다리를 붙든다. 모두 느린 몸동작으로 처리된다. 노인 의식 잃으면 등장인물들 본래 속도의 동작으로 돌아오고 함께 침대로 가 눕힌다)
의사 (무대중앙으로 걸어 나오며) 걱정하실 것 없어요. 일시적인 발작일 뿐이니까요. (의사, 수련의, 간호원 출입구쪽으로 걸어나가 완전히 퇴장하지 않고 무대구석에 앉는다. 이들도 꿈속의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청년 그럼 형이 이 집을 가져요.
K 서울에 버젓한 직장을 두고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란 말이니?
청년 형도 하기 싫은 일을 왜 나한테 강요해요!
K 그 땅을 팔아서 할 일이 있어. 저렇게 누워 계시니 무슨 말씀이 있으실 때도 됐는데….
청년 아무리 형이라도 그 땅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요.
K 네 몫은 이 집이면 충분해.
청년 이런 산골의 집이 얼마나 나간다구.
K 이 자식이! 아버지의 마지막 여생을 바치신 곳이야.
청년 그게 뭔데요.
K 아버지의 숙원이신 위령탑을 세우는 일이야.
청년 명분은 그럴 듯하군요.
K 너도 알거야. 아버지는 평생을 망령들에게 시달리셨어.
청년 하지만 그건 이미 우리 몫이 아녜요.
K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것에 목숨을 바친 분들이 가엾지 않니?
청년 아버지가 혼자 살아 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건 부당해요.
K 부당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네가 판단할 일이 아냐.
청년 아버지 세대에는 누구든 같았어요. 마치 역사의 비극을 송두리째 떠 안은 것처럼 행동하시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K (청년의 따귀를 때리며) 자식, 네가 뭘 안다구! (K와 청년의 동작이 정지되면 빗발치는 총성 들린다. 의사, 수련의, 간호원 뛰어나와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듯한 모션 취한다. 이들 손에는 헝겊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팔, 다리의 형상이 들려있다. 쓰러짐과 동시에 무대 위에 나뒹군다. 노인도 합세한다. 어느덧 총성 멈추면 무대 위 시체더미 위에 노인 우뚝 서있다. 떨어진 팔과 다리, 집게로 집어 가운데 침대 밑으로 밀어 넣으며 가볍게 흥얼거린다)
노인 무슨 인연으로 이 자리에 모였나. (막대기로 침대 밑을 쑤셔대며) 활활 타올라라, 이승일랑 가볍게 여기시고 저승 문턱을 넘어가리니… 그래도 되돌아볼 일이 있으시거든 망각의 강으로 먼저 가소서. 이곳의 일일랑 흐르는 강물 속에 지워버리고… 음, 피의 제전을 즐기시는 신들께 한 말씀 여쭐까 합니다.
종말이라는 대명제를 내거시고 우리의 비창함을 즐기시는 신들께 한 말씀 여쭐까 합니다. 이 불이 다 타올라도 씻어지지 않는 인간의 죄가 있거든 차라리 앞당겨 종말을 고하심이 어떠실는지… 영혼의 방이 비는 날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전람회그림 4곡, 『우마차』가 흐르면 모두 천천히 일어나 노인, 의사, 수련의, 간호원, 청년 순으로 일렬로 선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가면을 벗는다. K 의사에게 먼저 다가간다)
K 아, 지점장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야비할 정도로 굽실거린다) 오늘 점심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노인 (귀찮다는 듯이) 용건만 듣고 싶소.
K 저희 회사에 융자를 좀….
노인 (K를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생각해 봅시다.
K (의사에게 다가간다) 아, 사장님. (역시 굽실거린다)
의사 자네 이름으로 산 내 주식 어떻게 됐나?
K 그게, 좀….
의사 신경 좀 써. 능력도 좀 테스트할 겸 일부러 맡긴건데.
K (굽신거리며) 아. 네, 네. (의사 뒤돌아서면 다음으로 수련의에게 다가간다. 조금 당당한 모습이다) 이계장, 자네 거래어음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떻게 하나.
수련의 (굽실거리며) 죄송합니다.
K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목적한 바를 달성해야 해. 하면 된다. (수련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난 이 말을 할 때면 구시대의 향수에 젖게 된단 말일세.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요새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선 과정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수련의 (여전히 굽실거리며) 아. 네, 네. (수련의 돌아서면 K 약간은 기운빠진 모습으로 간호원에게 다가간다)
간호원 어휴, 술 냄새. 어디서 이렇게 마셨어요. (애교스럽게 팔장을 끼며) 여보. 내일부터 골프치기로 했어요.
K 골프?
간호원 옆동 아줌마 따라서 오늘 한번 가봤는데 수준이 틀린거 있지. 입고 있는 옷들하며 차는 어떻고…. 여보, 오늘 점심은 또 어디서 먹었는지 알아요.
K 당신 정신 나갔어. 내 월급에 골프가 말이 돼!
간호원 이이 좀 봐.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니까. 내가 뭐 나 즐기려고 그런데 다니겠다는 줄 아나봐. 이것도 다 내조라구요. 거기 오는 여자들 남편들이 얼마나 쟁쟁한 사람들인 줄 알아요. 다 당신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될 때가 있을 거예요.
K 내조도 좋지만 밥부터 줘.
간호원 (손을 내밀며) 내가 골프를 시작하는 건 상류사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될 거예요. 그러니 돈부터 좀 주세요. (K 간호원 어깨 밀면 돌아서고 청년에게 다가간다)
청년 (어린아이 목소리로) 아빠, 돈 주세요. 람보 게임 비디오 사야돼요.
K (허탈한 표정으로) 아빠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청년 아빠도 참, 다녀오셨어요. (손 내밀며) 돈 좀 주세요.
K (청년의 손바닥을 치며) 여기 있다.
청년 (돌아서며) 감사합니다. 아빠. (K 다시 노인에게로 다가가면 모두 객석을 향해 돌아선다)
K 지점장님, 저희 회사에 융자 10억만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노인 돌아서면 의사에게 다가간다) 사장님 주식이… 그러니까 저… 사장님 주식뿐이 아니고 오른 종목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폭락만 안한것만도…. (의사 돌아선다. K 수련의에게 다가간다)
K 그래. 그렇게 몰아붙이면 되는 거야. 그 일도 마무리됐고 하니 이젠 내 주식에 신경 좀 써주게나. (수련의 돌아선다. 간호원에게 다가선다)
간호원 (큰소리로) 여보! 한국은행 돈은 다 어디로 갔는데 당신은 맨날 돈이 없다고 그래요. 우리 차도 바꿔야할 것 아녜요. 요즘 나오는 신형보다 스피드가 얼마나 떨어졌는데… 난 답답해서 그 차 못 타고 다니겠어요. (K 귀막으며 돌아서면 간호원 K의 어깨를 잡고 자신에게 다시 돌려놓고 자기가 돌아선다. K 청년에게 다가간다) <10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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