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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이 왜 문제가 되나

중앙일보

입력

뉴스위크 네덜란드 정부는 이제 막 무슬림들이 공공장소에서 베일을 착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로마 교황청은 베일 착용이 현지 문화와 정서를 무시한 행동이라고 선언했다. 독일의 북부 라인-베스트팔리아주 관리들은 5월부터 실시된 금지 조치를 거부하고 두건을 착용하는 무슬림 교사들을 징계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영국에선 잭 스트로 전 외무장관이 전통적인 무슬림 복장은 “주민들을 분열시키며” 통합을 방해한다고 시사해 이 논쟁에 불을 붙였다.

그는 복합문화주의에 따르는 미묘한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가며 이렇게 말했다. “의사소통은 양측이 서로 얼굴을 봐야 가능하다. 그렇게 해야만 상대의 말을 들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영국 무슬림들은 즉각 스트로 전 장관의 내각 동료이자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데이비드 블렁켓 전 내무장관은 그러면 어떻게 장관직을 수행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트로가 상처를 주려는 뜻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지난 한 주간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았다.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는 “저속한 무슬림 문화”를 공격했다. 영국의 타블로이드지들은 앞을 못 보는 한 여성이 맹인견을 차에 태우는 행동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위배된다며 승차를 거부한 무슬림 택시운전사를 비난하는 글들을 쏟아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조차 이례적으로 나서 베일은 “분리의 표시”라고 쏘아붙였다.

서구에 사는 무슬림 여성 중 극소수가 얼굴을 가리려고 착용하는 허접한 헝겊 조각(넓이가 20㎠도 채 안 된다)을 둘러싸고 이런 소란이 벌어질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번 소란은 분명 무슬림 여성의 복장이 위기를 불러온 첫 사례도 아니고,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베일 문제가 이토록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을까. 이로써 무슬림은 융화가 불가능한 소수일 뿐 아니라 유럽의 생활양식에 맞지 않으며 심지어 안보에도 위협이 된다는 의혹까지 깊어졌을까.

이 논쟁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내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다. 나는 젊고, 전문적이고, 잘 교육받았으며, 영국 사회에 “잘 통합된” 여성이다. 단지 나 자신의 신앙을 보란 듯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싱가포르에서 자랐다. 가족 중 어떤 여성도 머리 가리개를 착용하지 않으며, 종교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행위는 시대 조류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사회정의에 관한 강한 의식에 이끌려, 또 종교성을 다시 찾으려고 대학에서 이슬람을 “찾았다”. 그리고 대학에서 운동가로 활동했다.

머리 가리개(히잡)를 착용키로 한 결정은 처음엔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진정 내가 누구이며, 또 어떤 가치들이 나를 인도하는가에 관한 자신감과 더 많은 관련이 있었다. 아마도 얼굴까지 감싸는 베일(니카브)은 결코 착용하지 않을 듯하다. 솔직히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급적 관대한 태도로, 자신이 원하는 복장을 하겠다는 다른 무슬림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또 보호할 작정이다.

최근 블랙번으로 취재하러 갔을 때 깨달았듯 이 같은 노력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블랙번은 영국에서 가장 비난받는 무슬림 중심지로 스트로 의원의 지역구다. 동시에 베일 착용을 선택하는 젊고, 교육받고, 소신이 분명한 아랍계 여성이 갈수록 느는 곳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파테마 마야트 교수다. 대학에서 심리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그녀는 자신이 베일을 착용하는 이유에 관해 이슬람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종교적 복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남에겐 그런 선택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베일은 이 나라가 가진 놀라운 다양성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다정하고 외향적인 그녀는 무슬림이 아닌 이웃들과 거의 매일 대화한다. 베일을 착용해도 상대방이 좀처럼 적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그녀와 여동생이 최근 모로코를 방문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현지인들은 두 자매에게 “헤즈볼라(성전)!”를 외쳤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니카브는 통합이나 통합이 부족하다는 상징과는 별 관계가 없다. 통합의 더 좋은 척도는 바로 사회참여다.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무력하리라고 여겨진다. 게다가 남편뿐 아니라 낙후된 문화의 담보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스트로를 그토록 불편하게 만든 베일을 착용한 여성들이 과연 그럴까. 그들은 지역사회에 충분한 관심을 보이며 지역구 의원을 만나러 갈 정도로 영국의 민주적 절차도 충분히 배웠다.

얼마나 많은 영국인(프랑스인이나 독일인도 마찬가지)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지역구 의원의 이름을 기억할까. 공개적인 모임을 통해 의정활동을 감시하는 일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그리고 무슬림 여성의 정신적 건강과 성적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무이한 프로그램을 창시한 안-니사 협회(웸블리 소재)와 같은 조직은 또 어떤가.

그 협회는 이번 주 무슬림 아버지들을 더 잘 지원하는 안건을 두고 최초로 전국 규모의 회의를 개최한다. 그 회의에 참석하는 무슬림 여성들 중 일부는 니카브나 히잡을 착용할 전망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전혀 착용하지 않는다. 사실 히잡 착용 여부는 별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복장이 아니라 대화다.

프랑스에서 베일 착용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논란이나, 2004년 이슬람에 비판적인 영화를 제작했다가 독일계 모로코인에게 암살당한 네덜란드의 영화 감독 테오 반 고흐를 둘러싼 소란처럼 영국의 베일 논쟁도 일부 “위험한 자들”의 존재보다는 유럽 자체의 정체성 위기와 더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유럽이 상승세를 타야 할 이때 이슬람은 한 시대의 끝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으며 희망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종교를 중시하는 열정적이고 강인한 무슬림 사회의 존재는 유럽의 모습을 바꾼다.

에릭 카우프먼 기자가 영국의 시사문화 잡지 ‘프로스펙트’ 최신호에 쓴 글에 따르면 유럽은 무슬림들의 이민 급증에 높은 출산율까지 겹쳐 이슬람 인구가 현재 전체의 4%에서 2050년께면 26%로 늘어난다고 예상된다(호주 규모의 인구가 느는 꼴이다). 따라서 종교적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인종적 또는 민족적 관점에서 주민(또는 국가)을 생각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물론 프랑스처럼 인구의 다양성에 눈을 감는 태도는 자기파괴적이다.

많은 유럽인에게 베일은 문명적 차원의 도전이자 “기독교적 정체성”의 위협을 뜻한다.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최근 우연하게 우군을 찾았다. 영국에서 ‘인종 평등 위원회’를 이끄는 트레보 필립스다. 그는 최근 베일을 둘러싼 추한 논쟁과 영국에서 보다 보편화된 ‘무슬림 따돌리기’가 2001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발생한 사태와 비슷한 인종 소요를 촉발시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파리에서 유사한 소요가 생긴지 1년 만에 나온 필립스 회장의 경고는 영국의 무슬림 사회가 폭발을 기다리는 압력솥이며 무슬림들은 민주주의에 평화롭게 참여할 능력이 없으므로 특별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널리 퍼진 인식을 심화시켰다.

이 모두가 “다문화주의”의 이상(理想)을 향한 영국의 믿음을 약화시켰다고 안-니사 협회의 공동 창설자인 후메라 칸은 믿는다. “다문화주의의 성취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의 국민으로서 사람들의 외모에 보다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게 됐다는 점”이라고 그는 말했다.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배운 지금 베일을 착용하는 여성들에게서 그런 자유를 빼앗아야 하는가. “우리는 다양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두고 대규모 토론을 개최할 필요가 있다”고 칸은 말했다.

무슬림들도 반드시 스스로를 돕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슬람의 강한 신학적 메시지와 그것이 유럽에서 갖는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들의 상징물을 지키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쏟는다고 일부 비판자는 지적한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나비드 아크타르는 “이 같은 비판은 정신적인 공백을 드러낸다”며 “이슬람은 상징물에 집착하는 종교로 바뀌었다.

두건이나 턱수염이 아니라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고 말했다. 사실 무슬림들은 스트로와 블레어가 암시하듯 이웃들에게 두려움이 들지 않게 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만일 이웃이 당신 때문에 겁을 먹는다면 이는 이웃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가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쓸 의무가 있다.”

이런 내적인 투쟁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된 지 몇 년 뒤인 거의 15년 전에도 영국의 무슬림 잡지 Q-뉴스의 창립자이자 편집자인 파우드 나흐디는 신랄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턱수염과 두건과 할랄 푸드(이슬람 율법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잡은 동물 고기)를 뛰어넘는 21세기 무슬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그 질문에 답하려 애쓴다.

그러나 조만간 ‘유럽 이슬람’의 등장도 불가피하다. 1400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진정성이 담겨 있으며 오늘날 유럽에서 사는 우리에게 문화적으로 적절한 그런 이슬람 말이다. 특히 영국에서 사는 무슬림 다수는 나처럼 젊고, 정치에 관심이 있다.

사회적으로도 활동적이며 이라크 붕괴와 테러와의 전쟁에도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활발한 논의를 갈망한다. 우리는 유럽 역사상 가장 세계화한 세대인 동시에 전 세계 이슬람의 보다 넓은 정신적 세계(움마)뿐만이 아니라 우리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조국과도 연계된 세대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계에 어떤 얼굴을 보여주든 함께 미래를 개척해가는 영국 시민이다.

베일 착용을 둘러싸고 경종을 울리는 사람들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 유럽 무슬림들이 통합되도록 요구받는 대상이 정확히 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베일보다도 더 고립을 초래하는 절박한 요인들이 있다. 빈곤, 주택난, 그리고 형평에 맞는 일자리와 교육 기회의 부족이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점만 밝힌다. 우리는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다. 우리는 이곳에 살며 대부분은 이미 유럽 사회에 통합됐다. 베일을 착용하건 안 하건 간에 말이다.

FAREENA ALAM (필자는 영국 무슬림 잡지 Q-뉴스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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