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등 기증작들로 꾸린 한국 구상 미술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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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봉의 '국화'(1958) 앞에 선 관람객.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이건희컬렉션 104점 등으로 꾸린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도상봉의 '국화'(1958) 앞에 선 관람객.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이건희컬렉션 104점 등으로 꾸린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각이 진 백자 화병에 꽂힌 백일홍은 54년이 지나도록 차분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캔버스 결이 보일 정도의 잔잔한 붓질로 그린 ‘국화’(1958)도 전시장 앞머리에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도상봉(1902~77)은 백자에 꽂혀 곧 시들어 없어질 꽃에서 지고지순한 이상미를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관에 도상봉의 정물화ㆍ풍경화 16점이 전시됐다.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다.

이건희 컬렉션 104점 등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작품전’

도상봉, 백일홍, 1970, 캔버스에 유채, 24.7x33.5㎝, 이건희컬렉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도상봉, 백일홍, 1970, 캔버스에 유채, 24.7x33.5㎝, 이건희컬렉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도상봉은 우리나라 서양화가 1세대다.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창설해 이끌어 나가며 새로운 나라의 미학의 기준을 세우고자 했다. “내가 평생 추구해 온 미술의 세계란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 서양화의 정통을 세우려는 것, 한국 서양화의 아카데미즘을 정립해 보려던 것”이라고 돌아봤다.

구태의연하다고? 구상 회화 무시 말라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구상미술은 당시 대중의 취향을 이끌었고, 한국 화단의 형성과 성장에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추상화가 한국 미술의 대세가 되면서 구시대의 미술로 여겨지거나 극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찌감치 파리에서 서양화를 배운 이종우(1899~1981)의 토로도 아카데미즘을 평가절하하는 세태를 보여준다.

나도 야수파처럼, 아니면 표현파처럼 멋들어지게 쓱싹쓱싹 휘갈겨 그리고 싶기는 하지만 역시 그림이라는 건 반듯해야 하고 질서가 있고 너무 지나치게 원색으로 과열되지 않는 색 면을 지닌 화풍이 내 분수에도 맞고 우리 한국 미술의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더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러한 화풍을 아카데미즘이라고 한다는 거야.” 

박고석, 도봉산, 1970년대, 캔버스에 유채, 45.5x52.7㎝, 이건희컬렉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고석, 도봉산, 1970년대, 캔버스에 유채, 45.5x52.7㎝, 이건희컬렉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어떤 화가들은 여기 평생을 건 끝에 자기만의 그림을 남겼다. 박고석(1917~2002)은 “우리 풍토와 체질에서 공감”하는 회화가 우리 미술이 지향할 방향이라 여겨 북한산ㆍ설악산ㆍ지리산 등 전국의 명산을 여행하며 툭툭 끊듯이 그은 선들로 우리 산세를 속도감 있게 그렸다. 겨울 설악산에서 조난을 당하고도 “십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행운”이라고 했을 정도다.

서대문 집 테이블 옆에 선 어린 아들의 모습을 담은 윤중식의 '소년과 정물'(이건희컬렉션)을 보고 있는 소년들. 연합뉴스

서대문 집 테이블 옆에 선 어린 아들의 모습을 담은 윤중식의 '소년과 정물'(이건희컬렉션)을 보고 있는 소년들. 연합뉴스

BTS RM의 소장품으로도 잘 알려진 윤중식(1913~2012)의 그림도 여러 점 출품됐다. 평양 출신으로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마티스의 제자였던 나카가와 기겐에게 배운 윤중식은 아내와 큰딸은 고향에 둔 채 막내 여동생과 아들하고만 월남했다. 여동생은 끝내 굶주려 사망하고, 아들과 단둘이 살았다. 노을 지는 전원 풍경을 즐겨 그려 ‘석양의 화가’라 불렸다.

김태, 건어장, 1979, 캔버스에 유채, 46x53㎝, 유족 기증.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태, 건어장, 1979, 캔버스에 유채, 46x53㎝, 유족 기증.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재료비가 부족해 미군 부대 천막을 캔버스 삼아 그린 김태(1931~2021)의 회화도 대거 기증되면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김태는 생선을 줄에 엮어 해풍에 말리는 건어장 풍경을 즐겨 그렸다. 생전에 "건어는 북한에서 서당 다닐 때 처음 그리기 시작했다. 어촌에서는 서당 수업료를 어물로 대신하곤 했다. 펴서 말리는 물고기가 새가 날아가듯 신기해 보였다"고 돌아봤다.

"더 널리 보이고 싶어서" 이건희 컬렉션 순회 후 잇따르는 기증

오지호ㆍ김인승ㆍ박수근ㆍ장욱진ㆍ전혁림 등 33명의 150여 점을 내건 이번 전시 중 이건희 컬렉션은 104점. 전시는 이처럼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이 토대가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만 1560점 중 기증품이 55.6%로 절반이 넘는다. 2018~2020년에는 한 해 기증작이 두 자릿수 수준이었지만 2021년 이건희 컬렉션 1488점 외에도 개인소장가(동산방 박주환 전 대표)와 작가ㆍ유족으로부터 536점이 들어왔다. 이후 2022년 117점, 2023년 297점 등 기증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문학진의 '흰 코스튬'(가운데)를 보고 있는 관람객. 유족들이 기증했다. 연합뉴스

문학진의 '흰 코스튬'(가운데)를 보고 있는 관람객. 유족들이 기증했다. 연합뉴스

윤중식 화가의 그림 20점을 기증한 아들 대경 씨는 "이건희 컬렉션이 전국 순회를 하는 걸 보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태의 작품 38점을 기증한 아들 수정 씨도 "예술 작품의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이 감상할 때 발생한다"며 "미술관에서 전시될 때 아버지의 컬렉션이 한 세트가 되어 보기 좋은 모습이 되도록 (기증작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성인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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