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대통령은 뒤로 빠진 이상한 연금개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편집인

고현곤 편집인

윤석열 정부의 연금개혁은 F학점이다. 성과가 없고, 논의 과정에 허점이 많았다. 윤 대통령이 대선 때부터 연금개혁을 강조했지만, 말뿐이었다. 대통령은 물론 정부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연금개혁특위도 대통령 직속이 아닌 국회에 뒀다. 집권 초기 2년, 개혁의 골든타임이 지나갔다.

정부가 질질 끌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개혁안은 맹탕이었다. 가장 중요한 얼마를 내고(보험료율), 얼마를 받을지(소득대체율)가 빠졌다. 정부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뭐하다, 궁색한 얘기다. 총선 앞두고 표 잃을까 봐 개혁하는 시늉만 한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에서 “(개혁안이) 6000쪽의 방대한 자료”라고 자랑했다. 원래 알맹이가 없으면 보고서가 길어지는 법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4개 안을 나열해 놓고, 아무것도 안 했다. 지금까지 비판받는다. 윤석열 정부도 오십보백보다. 안 자체를 내놓지 않았다. 그러곤 국회에서 알아서 하라고 떠넘겼다.

정부 일인데 질질 끌다 국회 떠넘겨
입장 모호하고 말뿐, 골든타임 놓쳐
‘더 내고 덜 받는’ 정부안부터 만들어
정치 생명 걸고 대국민 설득 나서야

총선을 앞둔 국회에서 연금개혁은 관심 밖이었다. 국회 연금특위는 대충 뭉개다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에 맡겼다. 21대 국회 임기를 불과 4개월 앞둔 때였다. 정부 안이 없는 상태에서 공론화위가 복수 안을 만들었다. 1안은 보험료율 9→13%, 소득대체율 40→50%. 2안은 보험료율 12%, 소득대체율 40%. 둘 다 기금 고갈 시기를 2055년에서 겨우 6~7년 미루는 어설픈 안이었다. 개혁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고갈 시기를 적어도 한 세대(30년) 이상 늦춰야 한다.

공론화위는 1, 2안을 놓고 500명 시민대표단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56%가 ‘더 내고, 더 받는’ 1안을 찬성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더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전 국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잡다기한 사안을 인기투표하듯 여론조사로 결정한 건 잘못이다. 1안은 2093년까지 누적적자가 702조원 증가한다. 아이들에게 엄청난 빚을 떠넘기는 엉터리 안이다.

여야는 1안을 토대로 소득대체율 43%(국민의힘)와 45%(민주당)를 놓고 티격태격하다 입법이 무산됐다. 43%와 45%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중간인 44%로 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게 적당히 흥정해서 정할 일인가. 공론화위 관계자는 “아무것도 안 하느니 이렇게라도 고치고, 추후 손보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번 조정하면 언제 다시 고칠지 기약하기 어렵다.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 될 뻔했다.

국회만 탓할 일은 아니다. 정부는 뒷짐 진 채 입장이 모호하다. 공론위 1안에 대해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회색지대에서 관전평 하듯 국회 안을 비판했다. 총리나 장관은 보이지도 않는다. 의지가 없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한 처신이다. 의사 증원 문제도 그렇지만, 보건복지부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이제라도 연금개혁이 성공하려면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한다. 세상 어느 나라에도 정부 안 없는 연금개혁은 없다.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현실의 벽을 깨지 않으면 필패다. 윤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부도 연금개혁을 방치했다”고 말했다. 사실관계가 틀린 데다 과거 정부를 비난할 입장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낮췄다. 집권 5년 내내 욕을 먹으면서 총대를 멨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무원연금개혁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당시 정부 담당자에게 매일 협박 전화가 걸려올 정도로 험악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연금 수령 시기를 62세에서 64세로 늦췄다. 극렬한 시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연금을 삭감하고, 수령 시기를 67세로 늦췄다. 유럽의 병자 그리스는 2022년 5.9% 성장하며 새롭게 태어났다. 2004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격렬한 몸싸움까지 하며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에 성공했다. 세 나라 지도자는 정치 생명을 걸고 진두지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윤 대통령은 “연금개혁을 22대 국회로 넘겨 좀 더 충실하게 논의하자. 정부도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일머리를 국회에 떠넘기고, 정부는 조연 역할에 머물겠다는 뉘앙스다. 적극 나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연금개혁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해내겠다. 국회도 도와 달라.’ 정부가 주연이고, 국회는 조연이다. 이걸 호도하거나 헷갈리면 안 된다.

연금개혁은 ‘더 내고 덜 받는’ 게 정답이다. 고통스럽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덜 받으려면 소득대체율을 낮추거나 수령 시기를 늦춰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보험료율은 18.2%, 소득대체율은 42.3%다. 우리보다 두 배나 더 내고, 비슷하게 받는다. 더 늦기 전에 정부 주도로 객관적인 재정 계산을 통해 책임 있는 개혁안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 또한 정부의 몫이다. 아직 3년 남았고, 기회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