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서, 식당서, 거리서…잠행한다던 한동훈 '목격담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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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 활동을 중단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11일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봤다는 목격담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다. 사진 디시인사이드 캡처

최근 공개 활동을 중단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11일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봤다는 목격담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다. 사진 디시인사이드 캡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알쏭달쏭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4ㆍ10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잠행을 택했다. 그러나 물밑 행보라기엔 도처에서 목격담이 흘러나온다.

목격담은 크게 두 갈래로 정리된다. 하나는 식사 정치다. 그는 인천 계양을에서 낙선한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과 12일 저녁 서울의 한 중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원 전 장관이 먼저 만남을 제안했다고 한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전당대회 개최 등 당 현안 관련 이야기를 나눴을 것으로 보인다. 한 전 위원장은 총선 과정에서 영입한 민주당 출신의 이상민 의원과도 조만간 만날 계획이다.

앞서 한 전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사퇴 닷새 뒤인 지난달 16일 자신의 우군인 비대위원들과 저녁을 함께했고, 지난 3일 저녁엔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형동 의원과 당 사무처 당직자 등 20여명을 시내 모처 중식당에서 만났다. 총선 과정에서 두 차례 갈등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달 오찬 제안을 건강 상의 이유로 거절한 것과 대비된다.

목격담의 또 다른 하나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한 입소문(바이럴)이다. 한 전 위원장 팬클럽인 ‘위드후니’, 디씨인사이드 ‘한동훈 갤러리’ 등엔 사용자들이 연일 한 전 위원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주요 활동을 중계하다시피 전한다. 원 전 장관과의 식사 당일인 12일 오후 9시 무렵 디씨인사이드에 “도곡동 XXX에 (한 전 위원장이) 원희룡이랑 같이 들어왔고 본 사람 되게 많대. 안 믿으면 관둬”라는 글이 올라오는 식이다.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 인근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통화하며 거닐고 있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사진 엑스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 인근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통화하며 거닐고 있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사진 엑스

한 전 위원장이 자택 인근인 도곡동에서 통화하며 걷는 뒷모습이나, 분홍색 골전도 이어폰을 착용하고 양재오솔숲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모습 등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처음 게시돼 확산됐다. 의도했든 아니든 한 전 위원장에 대한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한 전 위원장이 도서관에서 읽은 것으로 알려진 김보영 작가의 「종의 기원담」은 교보문고 국내소설 일간(12일 기준)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전날보다 14계단 급등한 6위에 올랐다. 김근식 전 국민의힘 비전전략실장은 13일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전 위원장이) 책을 봤다는 건,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책 보는 걸 보여주고 싶은 또 하나의 의도하지 않은 의도도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한 전 위원장의 최근 행보가 윤 대통령의 정계 입문 전 그것과 닮았다는 반응이 많다. 윤 대통령도 2021년 3월 초 검찰총장에서 퇴임한 이후 그해 6월 대선 도전을 공식 선언하기까지 철저히 잠행하되 근황과 생각은 간접적으로 퍼뜨리는 방식을 택했다. 당시 권성동ㆍ정진석 의원 등 정치인과의 접촉은 물론이고 각계 전문가나 보훈 관련 유공자 등의 만남이 모두 목격담이나 전언 형태로 기사화됐다.

이 때문에 당 안팎에선 “한 전 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우면서도 정치적 유산은 그대로 이어받은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대선 당시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단체가 최근 한 전 위원장 자택 인근에 “그대가 있기에 희망을 보았습니다”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신평 변호사는 9일 SBS 라디오에 나와 “지난 대선 과정을 통해 윤석열 후보를 지원하는 조직이 전국 각지에 설치됐는데, 그 조직이 한 전 위원장 측으로 다 흡수됐다”고 주장했다.

4월 17일 오전 국회 헌정회관 앞에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응원하는 화환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4월 17일 오전 국회 헌정회관 앞에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응원하는 화환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한 전 위원장의 노출이 잦아지자 국민의힘에선 그의 당권 도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 전 위원장 측 인사도 “조기 등판할 경우 집중 공격을 받아 한 전 위원장이 소진되고 고생할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라면 시간을 늦출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은 한 전 위원장의 등판을 부추긴다. 에이스리서치(뉴시스 의뢰)의 지난 8~9일 ‘국민의힘 대표 적합도 조사’에서 한 전 위원장은 26%를 기록해 유승민 전 의원(28%)의 뒤를 이었다. 국민의힘 지지층 대상으로 한정했을 땐 한 전 위원장의 적합도가 48%로 가장 높았다.(※만 18세 이상 1000명 대상 무선 ARS조사. 표본오차(95% 신뢰수준)는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다만, 여권에선 총선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난 비대위원장이 뒤이은 당 대표 경선에 뛰어드는 것이 정치 도의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상당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9일(현지시간) UAE 아부다비에서 가진 동행기자단 간담회에서 “여당이 ‘이ㆍ조(이재명ㆍ조국) 심판론’ ‘운동권 심판론’을 해서 야당의 정권 심판론 프레임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며 한 전 위원장의 총선 전략을 비판했다. 영남 중진 의원은 “친윤 핵심 이철규 의원도 총선 책임론이 부각되며 원내대표 경선에 불출마했다”며 “원톱으로 선거를 이끈 한 전 위원장이 당권에 도전한다면 대선 패배 후 당권에 도전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다를 게 뭐냐”고 꼬집었다.

대선 경선 출마자는 선거 1년 6개월(2025년 9월8일) 전에 당 대표를 사퇴해야 하는 국민의힘의 ‘당권ㆍ대권 분리’ 당헌도 한 전 위원장의 당권 도전을 제약한다. 대선에 나서려면 당 대표 임기(2년) 절반가량만 채우고 중도 사퇴해야 하는데, 한 전 위원장을 비롯해 유승민 전 의원이나 나경원ㆍ안철수ㆍ김태호 의원 등도 해당 당헌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황우여 비대위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당권ㆍ대권 분리는) 여러 논란을 거쳐 확립된 20년 된 전통”이라며 “(개정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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