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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강대국 부상한 한국…세계질서 재편·관리 기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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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워싱턴에서 바라본 한국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우려는 적었고 기대는 많았다. 한국에 대한 미국 외교통들의 입장이었다. 필자가 얼마 전 미국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동아시아 안보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박빙의 대선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거친 외교적 수사에 과잉 반응을 할 필요는 없다. 거래적인 관점에서 동맹을 바라보는 트럼프는 해외 주둔 미군 철수를 방위비 분담금 협상 카드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 주류나 트럼프 2기 행정부 입각이 유력한 전문가 중에서 주한미군 철수·감축을 고려하는 인사들은 없는 듯하다. 주한미군 규모는 미 국방수권법이 2만8500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면 의회 승인이 필요하다. 미국 대통령 혼자 힘으로 결정할 수 없다.

트럼프 주한미군 철수 시사는 협상용 카드, 과잉 반응 금물
워싱턴 전문가들 대만해협 무력충돌 등 전쟁가능성 낮게 봐
미·중 패권경쟁 구도 속 예기치 않은 사건 발생할 수도 있어
한·미 동맹 기반한 ‘회복력에 의한 제약’ 전략 강구해 나가야

워싱턴 정계, 주한미군 중요성 공감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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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략적 핵심인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대한 대응은 미국의 초당적 목표다. 이를 위해 주한·주일 미군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 워싱턴 컨센서스다. 재집권에 성공해도 4년 재임 이후 사법 리스크를 직면할 수 있는 트럼프로선 공화당 주류의 뜻을 거스르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워싱턴 정책통들은 당분간 대만해협 무력 충돌을 비롯한 중국발 전쟁의 가능성을 상당히 낮게 보고 있다. ‘2027년 대만침공설’이 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던 1~2년 전과는 온도 차가 느껴졌다. 미 해군대학 앤드류 에릭슨 교수는 “장기적으로 중국의 군사력 증강 속도가 우려되지만, 단기적으로 미군의 군사적 억제력은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 국방연구원(IDA) 다니엘 취 박사는 과거에도 최악의 시나리오 예측은 대부분 틀렸다면서 최악의 시나리오에 매몰되지 말고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을 구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국의 증대된 국력과 역할에 대한 기대는 많았다. 워싱턴에서 한국의 위상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높았다. 미 하원 외교위원장을 역임했던 에드 로이스 전 의원은 미국 정·관·재계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서 이제는 일본의 존재감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주미 한국대사가 지난해 4월 부임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약 90명의 상·하원 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전대미문의 일이다. 트럼프 2기 입각이 유력한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가 주요 7개국(G7)에서 캐나다를 한국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인구 5000만명, 1인당 GNI 3만달러 강국

미국의 전략통들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위상과 국력에 걸맞은 새로운 외교·경제·기술적 기회를 제공할 뜻을 보였다. 동아시아를 넘어선 글로벌 차원에서 한국을 위한 기회의 창이 열리고 있다. 한국은 이제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며, 글로벌 중심국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를 역동적으로 활용할 때에 이르렀다.

필자는 1990년대 후반부터 워싱턴과 인연을 맺었다. 그 미국의 수도에서 지금 진행 중인 한국의 위상 변화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후진국으로 추락할 뻔했던 한국이 어느새 ‘열강(列强)’이 되어버렸다. 한국은 제국주의를 하지 않고도 약소국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한 최초의 나라다. 인구 5000만명과 1인당 국민소득(GNI) 3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전 세계 단 7개국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글로벌 파이어 파워(Global Fire Power)라는 군사력 지표에서는 올해 5위로 상승했다.

또한 한국은 바이오·반도체·배터리 등 차세대 3대 산업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나라다. 방위산업뿐만 아니라 한류로 대표되는 소프트파워도 막강해졌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한국을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전통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흥 강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 지정경 리스크 속 한국 입장 주시

그러나 한국사회는 지난 20여 년 사이에 빠르게 증대된 국력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지 모른다. 전략적 비전이 없고 의지도 부족하다. 한편 한국도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국내외 난제와 도전 요인들에 직면하고 있다. 대내적으로 심각한 정치·이념 갈등, 경제성장률 저하, 인구감소를 경험하고 있고, 대외적으로 미·중 대립으로 인한 경제·안보적 위기 상황이 심화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새로운 역사적 갈림길에 섰다. 강대국 반열에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 평화와 번영을 이끄는 국가로 한 발 더 도약할 것인가.

하버드대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학자들과 워싱턴 싱크탱크 정책통들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 문제였다. 전과 달리 미·중 패권경쟁을 비롯한 다양한 ‘지정경’(地政經) 리스크에 직면한 국제사회는 한국의 입장을 궁금해한다. 한국의 해법은 세계인들이 참고하는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싱가포르국립대 자옌총 교수는 동남아 지역 국가들이 세계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국이 취할 입장에 편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글로벌 차원의 미·중 경쟁 속에서 한국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그 경쟁의 지구적인 전개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 세계질서의 재편과 안정적 관리에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가 다수는 더 이상 세계질서의 ‘평화적 변경’, 즉 중국의 부상이라는 변화를 수용한 세계질서의 조정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현 상황에서 평화적 변경을 논의하는 것은 전략적 오판이라고 본다.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이 체코를 독일에 넘겨준 1938년 뮌헨협정을 낳았고, 결국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이 참담한 실패의 기억이 현재 미국 외교가에 도사리고 있다. 대중(對中) 온건파의 시각은 점점 더 비현실적 유화주의자의 견해로 치부되고 있다. 중국 역시 미국의 강경한 대중 압박에 맞서면서, 강 대 강 대립은 지속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렇게 심화한 미·중 대립 구조 속에서 세계질서를 흔들어 놓을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한·중 관계, 섬세한 관리 필요

세계질서에 큰 파문을 일으킬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한 준비와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은 한·미 동맹에 기반을 둔 ‘회복력에 의한 제약(constraint by resilience)’ 전략을 구상해 볼 수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와 시스템의 항상적 위험과 연쇄적 피해의 가능성을 직시하고,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대응 전략을 통해 잠재적 도발자(국가 또는 비국가 행위자)의 강압적 힘의 행사를 제약하는 것이다.

한국과 연계된 공급망·해운·군사동맹·정보통신 등 여러 네트워크의 복원력을 높여야 한다. 그러면 도발 효과를 감소시킴으로써 도발자의 강압 사용 역량을 제약할 수 있다. 가령 한·미 동맹의 강화로 인한 중국의 강압적 경제 조치가 있는 경우를 대비해서 한·미 양국과 우호국들은 공동의 공급망 탄력성 방안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해적에 의한 인도·태평양의 해양수송로 위협에 대비해 한국은 해양교통로의 주요 길목에 위치한 국가들과의 안보협의체를 구성함으로써 해운 네트워크의 회복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 ‘회복력에 의한 제약’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를 섬세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의 양자 협의뿐만 아니라 소규모 다자회의(예컨대 한·중·일 3국 회의, 아세안+3)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중국 등 규모가 큰 국가를 상대할 때는 1대1 양자 협상과 더불어 아세안과의 협력, 미국·일본 등과의 협력을 배후에 두는 레버리지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이 ‘국제규범과 규칙에 입각해 공동 이익을 추구’할 때는 중국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이 해상 교통로에 대한 공동의 안전과 항해의 자유를 준수한다면 한국은 중국과도 공동 협력을 구축해 나갈 수 있다.

한·미·일 의원 교류도 강화해야

외교 전략의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실행을 위해선 우방국 입법부 간 협력도 중요하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집단적 정책대응에는 ‘야당’의 역할이 불가결하다.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는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사회발전의 역동성이다.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이 되는 역할의 순환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야 의원들이 참여하는 한·미·일 3국 의원 교류 프로그램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주요 안보·경제 정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초당적 협력이 긴요하다.

동아시아 주변국에서 세계 중심국으로 부상한 한국은 국내외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녹록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위험한 지정경의 시대를 맞이해 한국은 선제적이고 진취적인 대응으로 국가 재도약의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전 세계에 영감을 준 지난 150년 동안 한국인들의 고투와 도약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