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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1300억 K방산 요람…목초지 마을 질롱 '들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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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호 01면

한국 방산 첫 해외기지 호주 현지 르포

호주 질롱시에 건설 중인 한화 현지 생산공장(H-ACE) 전경. [사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호주 질롱시에 건설 중인 한화 현지 생산공장(H-ACE) 전경. [사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지난달 19일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에서 남서쪽으로 60여㎞ 떨어진 질롱시로 향하는 길. 차창 밖 풍경은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가 전부였다. 검은 소떼와 하얀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한 시간가량 이어졌을 때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호주 생산공장(H-ACE) 건물이 위용을 드러냈다. 15만㎡의 드넓은 부지에 3만2000㎡ 규모로 들어선 생산공장은 한국 방산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다. 아시아 국가의 방산기업이 호주에 진출한 첫 사례로도 꼽힌다.

질롱시는 원래 포드 자동차 공장이 있던 지역이었지만 2016년 포드가 철수하면서 지역 경제에 한파가 닥쳤다. 한화가 이곳에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 20만 명의 조용한 목초지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1년 12월 한국이 호주와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장갑차 수출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질롱이 현지 공장 부지로 결정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후 지난해 12월 호주 수출 계약이 성사된 한화 ‘레드백’ 장갑차 129대도 이곳에서 생산하기로 하면서 질롱은 일약 ‘K-방산’의 최전방 해외 생산기지로 거듭나게 됐다. K-9과 K-10, 레드백 수출은 본계약 규모가 4조1300억원에 달한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2022년 4월 공장 건설의 첫 삽을 뜬 지 2년 만에 찾은 질롱 생산공장은 내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호주형 K-9 자주포인 ‘AS9 헌츠맨’과 호주형 K-10 탄약운반장갑차인 ‘AS10’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잭슨 도커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호주 사업개발담당 부사장은 “호주형 K-9 자주포와 K-10 생산 공장은 오는 7월 완공될 예정으로, 올해 11월부터는 본격적인 생산 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현지 인력 채용이 한창이고, 내부 시설도 5월 중엔 완벽하게 갖춰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호주형 K-9 자주포의 경우 한 작업대에서 10일씩 9단계를 거쳐 생산이 이뤄져 90일이면 한 대가 완성되는 공정”이라며 “한국 기업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효율적으로 결합되면서 납기일을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레드백 장갑차 생산 공장도 조만간 증축 공사에 착수해 2026년 6월부터는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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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호주의 방산 협력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엔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리처드 말스 호주 국방장관이 함께 질롱 공장을 방문해 공사 마무리 현장과 생산 라인 등을 둘러보기도 했다. 두 장관은 이날 회동에서 한층 심화된 양국의 방산 협력을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국방부는 밝혔다.

레드백 장갑차 129대도 질롱에서 생산공장 밖엔 ‘자주포·장갑차 테스트용’ 거대한 경사로

질롱 현지 생산공장 밖으로 나오자 너른 공터에 들어선 거대한 경사로가 눈에 띄었다. 현지 공장 관계자는 “K-9 자주포와 레드백 장갑차가 60% 경사로에 오른 뒤 멈춰서 버틸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장비”라며 “국제 표준에 따라 한화 창원 공장과 동일하게 설계됐다”고 전했다.

경사로 오른편에는 물탱크 두 개가 마련돼 있었다. 이 관계자는 “K-9 등 생산이 본격화되면 일정한 수심의 하천을 건널 수 있는지 시험하는 물웅덩이를 만들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공장 주변엔 1.5㎞ 길이의 주행 트랙 및 시험장, 도하 성능 시험장, 사격장, 연구개발(R&D) 센터 등 각종 연구·시험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호주 협력업체 공장들도 속속 입주를 앞두고 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질롱 공장이 입주한 빅토리아주도 ‘K-방산’ 수출 계약에 따른 낙수 효과가 예상보다 훨씬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스콧 아들링턴 빅토리아주정부 국방우주항공 담당자는 “호주 연방정부가 한화와 계약을 체결한 뒤 현지 생산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주정부 간의 입찰 경쟁이 매우 뜨거웠다”며 “1970년대 조성된 우주항공단지를 비롯해 방산 관련 산업이 발달했고 호주 국방 R&D 예산의 40%가 우리 주에 투자되고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유치 경쟁 뒷얘기를 전했다.

그는 “호주형 K-9 자주포 제작에 협력하는 지역 중소기업에 1000만 호주 달러(약 90억원)를 이미 투자했고 레드백 공급과 연계되는 기업에도 유사한 규모의 금융 지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빅토리아주정부는 한화 공장 유치가 지역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가 57억 호주 달러(약 5조13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지 생산공장의 본격 가동으로 현지인 채용도 늘면서 향후 12년간 질롱에만 1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역 경제도 한층 활기를 띠는 분위기다. 1300여 명의 직원이 근무 중인 안카(ANCA) 그룹은 멜버른 지역을 기반으로 50여 년 간 사업을 펼쳐왔다. 연삭기계(그라인딩머신)와 동작제어시스템 전문기업으로, 한국 기업과도 30년 넘게 거래해 왔다. 이번 한화 K-방산의 호주 진출 소식을 듣고 ‘코버스 테크놀로지 솔루션스(CTS)’라는 자회사까지 설립하며 방산 협력 강화에 적극 뛰어들었다.

CTS 사무실에서 만난 닉 윌리엄스 본부장은 “레드백 장갑차의 안정적인 주행을 위해 차체 아래 바퀴에 14개의 관련 부품이 들어가는데, 이와 관련해 한화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등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며 “연구진이 창원 공장에 가서 관련 기술을 익힌 뒤 이곳에 돌아와 생산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채우석 한국방위산업학회장은 “우리 기업이 첫 해외 생산기지를 세운 건 K-방산의 달라진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현지화에 성공해 호주 지역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면 앞으로 다른 방산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호주가 국방력을 강화하고 나선 것도 우리 방산기업엔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호주 국방부는 지난달 17일 ‘2024 국가 국방 전략’을 발표하면서 향후 10년간 국방비 지출을 기존 계획보다 500억 호주 달러(약 45조원)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한 해 호주 국방 예산과 맞먹는 규모다. 호주 국방 예산은 2019~20년 390억 호주 달러였던 게 지난해엔 사상 최고치인 526억 호주 달러(약 47조원)로 급증했다.

호주 정부의 이 같은 국방력 강화 전략은 무엇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국제사회의 공통된 분석이다. 호주는 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와 미국·인도·일본·호주 등 4개국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의 정식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미·중 갈등 국면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춰 왔다.

특히 호주는 해군력 강화에 중점을 두겠다는 방침을 세워둔 상태다. 말라카 해협 무역통상로 확보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해군력 증강을 통해 경제·군사적 이해를 공고히 하겠다는 심산이다. 이를 위해 2029년까지 차기 호위함 11척을 도입하기로 했다. 한국 기업도 이미 수주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셰인 터핀 서호주국방과학센터 수석연구관은 “현재 한국을 비롯해 일본·독일·스페인의 설계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호주 워클리재단이 공동 주최한 ‘2024년 한·호주 언론 교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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