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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데이터 경제 시대’에 역행하는 법원의 오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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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시대에 ‘데이터 경제’ 실현은 산업 혁신과 경쟁력 강화,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국가적 의제다. 미국·중국·일본·유럽연합(EU)은 이런 흐름에 빠르게 대응하면서 데이터 산업을 선도한다. 관련 제도의 기반은 개인정보의 ‘안전한 활용’을 도모하는 법제의 정착이다.

미국·일본·EU의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 그 자체를 보호하지 않는다. 개인정보는 사생활 비밀과 다르다. 개인정보는 모든 거래에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정보다. 개인정보의 처리(수집·이용·제공)는 사회가 원활히 기능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가명정보 처리’ 관련 법 해석 오류
개인정보보호 입법 취지 어긋나
해석 한계 넘은 판결 바로잡아야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또한 개인정보의 처리는 언론·출판의 자유, 정치 활동의 자유, 계약의 자유, 기업 활동의 자유 등을 실현하기 위한 기초다. 보호만이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개인정보의 오·남용을 막아 정보 주체의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 개인정보법의 취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개인정보법에 대한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개인정보를 사생활 비밀처럼 그 자체를 보호해야 한다거나, 정보주체의 동의가 없으면 개인정보의 처리는 불법이라거나, 정보주체가 원하면 무조건 개인정보 처리를 정지해야 한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이런 오해는 법률전문가에게서도 발견된다. 최근 가명(假名)정보의 처리에 관한 법 조항을 해석한 1심과 2심 법원의 판결에서도 이런 오해에 따른 해석 오류가 보인다.

2020년에 입법자(국회)는 데이터 경제 실현을 뒷받침하기 위해 개인정보법을 개정하면서 ‘가명정보의 처리에 관한 특례’(제3장 제3절 제28조의2에서부터 제28조의7까지)를 신설했다. 가명정보란 식별이 가능한 개인정보에서 식별자(Identifier)를 제거, 즉 가명 처리해 개인을 식별할 수 없도록 가공한 정보다.

만일 재식별을 시도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고, 엄격한 안전조치 의무를 위반해 유출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다. 누구든지 재식별 목적으로 가명정보를 처리하면 그 자체로 5년 이하의 징역 및 과징금을 부과한다. 이것도 모자라 국회는 가명정보의 활용 목적을 통계 작성, 과학적 연구, 공익적 기록보존으로 한정했다. 반면 일본과 EU는 목적에 제한 없이 가명 처리해 활용하도록 허용한다.

이처럼 국회는 가명정보의 재식별 가능성을 규범적·기술적으로 철저히 차단하면서 활용의 길을 열어줬다. 같은 법 제28조의2에는 ‘개인정보처리자는 통계작성 등의 목적을 위하여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가명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는 가명정보의 처리를 위한 새로운 합법적 근거를 특례로 신설한 것이다.

나아가 국회는 같은 법 제28조의7에 ‘가명 처리된 가명정보에 대해 정보주체의 권리인 열람청구권, 정정·삭제청구권, 처리정지청구권 등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명시했다. 이로써 국회는 가명처리 및 그 결과물인 가명정보를 수집·이용·제공하는 행위는 정보주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입법적 평가를 했다.

사실 가명처리는 어느 나라 법에서나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한 기술적 안전조치로 이해된다. 이처럼 국회는 국가적으로 시급한 데이터 경제 시대의 길을 열기 위해 정보의 보호(재식별 금지)와 활용의 균형을 맞춘 법률적 기준을 제시했다.

그런데 1심과 2심 법원은 국회의 입법 의도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지적된다. 법률은 특례로써 ‘동의 없는 가명정보의 처리’를 허용할 뿐 아니라 명시적으로 정보주체의 처리정지 청구권 행사를 배제하고 있다. 그런데도 법원은 이번에 정보주체가 가명처리를 정지해달라고 요구하면 개인정보 처리자는 무조건 가명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오판했다. ‘가명처리’와 ‘가명정보의 처리’는 별개 개념이라는 형식적인 논리를 동원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국회가 어렵사리 마련한 특례조항이 거의 무력화되고 말았다.

당초 국회는 재식별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한 가운데 가명처리의 활용 가능성을 열어줬다. 하지만 인공지능시대에 데이터 경제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던 국회의 의도가 법원에 의해 봉쇄된 셈이다. 이는 법률 해석권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법을 창설하는 것이라 권력분립의 관점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판결이다. 바로 잡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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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