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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봄바람’이 한국에 닿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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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유지혜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지혜 외교안보부장

유지혜 외교안보부장

“봄바람처럼 다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외상으로 재임(2012~17년)할 당시 일본 외무성 직원에게 들은 ‘기시다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직사회에서는 흔한 심기 경호로 애를 먹는 일도 별로 없다고 했다. 역사 도발을 일삼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로 인해 한·일 간 갈등이 심각했을 때라 부드럽고 정중한 스타일의 외상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한국에 다행인 측면도 있었다.

지난 3일 브라질을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지난 3일 브라질을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지금의 양국 관계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개선됐다. 지난달 17일 기시다 총리가 먼저 제안해 이뤄진 통화에서 기시다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미·일 정상회담 결과를 직접 설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를 의심했다. 예전 같았으면 미국을 통해 사후 설명을 들으면 들었지, 일본 측으로부터, 그것도 최고위급에서 이런 설명이 이뤄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양 정상 간 ‘브로맨스’는 환영하지만, 일본 측이 응당 해야 하는 실질적인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일례로 윤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제3자 변제 해법을 결단한 지 1년이 넘었지만, 필요 재원 마련에 일본 기업의 참여는 전무하다.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윤 정부가 ‘의지’만으로 여론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당장 악재가 층층이다.

일본이 해마다 교과서, 외교청서, 방위백서 등에 담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억지 주장은 ‘캘린더성 도발’로 부를 정도로 끊임이 없다.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라인’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지분율 조정을 통해 네이버의 힘을 빼 라인을 ‘강탈’하려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올 7월 결판이 날 일본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순식간에 한·일 관계의 기류를 바꿀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최소 1200여 명의 조선인이 동원돼 강제노역에 시달렸지만, 일본은 이를 누락한 채 에도 시대 때부터 금을 캐온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만 부각해 등재를 시도한다.

2015년에도 일본은 강제노동 사실은 쏙 뺀 채 나가사키(長崎)시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등을 등재 신청했다. 하지만 결국 강제노동 역사를 인정하고 기록하기로 약속하며 ‘조건부 등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약속을 아직 완전히 다 지키지도 않은 일본이 사도 광산에 대해 또 꼼수 등재를 고집하는 건 어떤 브로맨스로도 막을 수 없는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기시다 총리의 봄바람은 한국민의 마음에 닿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