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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이름도 가리게 만드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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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최모란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모란 사회부 기자

최모란 사회부 기자

전직 공무원 A씨는 악성 민원인에 시달리다 숨진 김포시 소속 공무원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 근무할 당시 악성 민원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민원인의 과도한 요청에 “안 된다”고 거절한 것이 시작이었다. 해당 민원인은 찾아오거나 전화로 욕설이 섞인 항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시청에 지속해서 “A씨가 불친절하다”는 민원을 넣었다. 시의원과 지역 언론에 A씨에 대한 거짓 내용을 제보하기도 했다. 각종 증빙 자료 등을 제출해 오해를 풀긴 했지만, 부정적인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여기저기로 퍼졌다. A씨는 “황당하고 억울했지만, 민원인에게 또 다른 빌미를 줄 것 같아서 제대로 대응도 못 했다”고 씁쓸해했다.

항의성 민원에 시달리다 숨진 경기도 김포시 공무원의 빈소가 지난달 7일 김포시청 앞에 마련됐다. [사진 김포시]

항의성 민원에 시달리다 숨진 경기도 김포시 공무원의 빈소가 지난달 7일 김포시청 앞에 마련됐다. [사진 김포시]

악성 민원으로 인한 피해는 A씨만의 일이 아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공무원에 대한 폭언·폭행·성희롱 등 불법 행위 건수는 4만1558건이다.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이 지난해 8월 21일부터 9월 8일까지 조합원 706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84%가 최근 5년 사이에 악성 민원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악성 민원으로 고통받다 숨진 공무원 사례가 이어지자 각 지자체는 속속 공무원의 이름과 연락처를 비공개로 전환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김○○’처럼 성(姓)만 표시하거나, 아예 직급만 게시하는 방식이다. 사무실 입구에 비치된 조직도에서 공무원의 사진과 이름을 빼는 지자체도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 김포시 등 50여 곳이 넘는 지자체가 공무원의 이름을 비공개로 바꾸거나 검토 중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공무원 이름까지 숨길까 싶지만, 일각에선 “모든 민원인을 잠정적인 악성 민원인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다. “공무원들의 신상을 가리면 ‘책임 행정’이 아닌 ‘소극·무책임 행정’ 같은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런 우려를 의식해 경기도는 다음 달 도청 직원과 도민 여론조사를 통해 공무원들의 신상공개 범위를 정하기로 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직원들 사이에선 신상정보를 비공개하자는 여론이 많지만, 행정 기관 입장에선 도민 불편 최소화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여론조사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상정보 비공개가 악성 민원의 해결책이 될지는 의문이다. 홈페이지 등에서 이름을 가려도 다른 창구를 통해 얼마든지 담당 공무원의 신상 정보 파악이 가능하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25일 서울 동대문구 종합민원실을 방문해 “공무원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안전한 민원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악성 민원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전임 장관들도 같은 얘길 했다. ‘뒷북’이나 ‘미봉책’이 아닌 제대로된 보호 대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